[시인의 등단 뒷얘기⑫이영옥] “자살 경주 부잣집 천재의 ‘단단한 뼈’가 내 시의 단초”

연재를 마치며···‘신춘문예’. 한때 이 네 음절만큼 문학도들을 설레게 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시나 소설 등을 통해 문학가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사 신춘문예는 시인이나 소설을 꿈꾸는 문학도들의 희망의 언덕이자 절망의 골짜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주요 일간지들은 시, 소설, 희곡, 평론, 시조 등의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를 통해 신인들을 대거 등단시켰다. <아시아엔>이 시전문 월간지 <유심>(편집고문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 발행인 겸 편집인 김도종)의 협조로?연재한 ‘시인들의 등단 뒷이야기’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편집자

[아시아엔=이영옥 시인] 어릴 적 내가 자란 경주시 인근은 가을이면 황금물결로 출렁거렸다. 부잣집 외아들에 천재라고 소문이 난 청년이 실종되었는데, 어느 날 경찰 사이렌 소리가 조용하던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벼를 베던 사람이 농약을 먹고 자살한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행방을 몰라 발을 구르던 가족들을 비웃으며 그는 백골이 된 상태로 바람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은 보지 못하게 막았다. 그 와중에 제 육신을 미처 수거해 가지 못한 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주 짧고 기이했던 만남. 순간 나는 무질서와 혼란을 넘어선 고요 속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내 시원始原의 단초가 될 줄 몰랐다. 그는 모든 고통에서 달아나 태초의 평온에 안겨 있는 듯 보였다. 등단작 ‘단단한 뼈’가 말하고자 했던 존재의 영원성, 겨우 일곱 살 되던 해에 잔망스럽게도 시인의 기미가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시를 쓰기 시작하고부터 삶과 죽음은 어떤 통로로 인간에게 오고 가는지 그 긴 의문은 ‘어느 형식의 고해’라는 산문시에 담겨 몇 년이 흘렀다. 2004년 신춘문예 마감을 앞두고 퇴고를 하는 과정에 ‘단단한 뼈’로 제목이 바뀌었고, 동아일보에 응모해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의 기쁨도 잠깐,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죽음’이라는 소재가 어느 문예지 당선작과 같다는 이유였다. 표절의 의혹을 담은 메일을 각 언론과 문학 단체, 그리고 이름난 작가들에게 보낸 사람은 재작년 타계한 박모 시인이었다.

당시 그 분은 이미 대단한 위치의 시인이었다. 시인의 시는 거침없는 통찰로 부조리를 시원하게 관통했으므로 문청시절 특히 좋아했다. 아무리 중앙지 신춘문예지만 한낱 무명 시인의 등단에 무슨 관심일까 의아했다. 알고 보니 자신이 트레이닝 시켰던 문청이 동일 일간지에 응모했는데 유감스럽게도 내 작품이 낙점되어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밤낮없이 심한 욕설로 전화를 해대는 통에 족히 두 달은 시달렸다. 나뿐만 아니라 본심을 했던 선생님도 괴롭힘을 당했다. 시작도 해보지 못한 문학에 회의를 느꼈지만 “시는 모험 한가운데에 있다”란 말로 나를 다독였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그때의 일로 요즘도 악몽을 꿀 만큼 누구보다 혹독한 등단이었다.

그 일이 있고 2년이 지난 2007년 겨울, 그가 부산의 문학행사에 참석했다. 눈빛은 활화산처럼 들끓었지만 낯가림 때문인지 말수가 적었다. 지방 특유의 따뜻한 환대에 마음이 녹았는지 뒤풀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편견이 무너지니 무섭기만 했던 광기도 개성으로 느껴졌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불화는 섬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배웅 인사를 건네자 답례로 발표작을 잘 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등단작의 주인공인 비운의 천재 청년이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타~앙, 방아쇠를 당기고 사라진 박모 시인이나 태초의 평온에 고요히 닿아있길 바란다.

단단한 뼈

실종된 지 일 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 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는 바람이 울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 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이영옥 ‘시작’ 2005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사라진 입들>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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