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⑥박남준] 조태일과 마포 최대포집서 난생 처음 돼지갈비 “달디 단 소주의 추억”

[아시아엔=박남준 시인] 술자리였다. 전주 완산동에 있던 김제집이라는 막걸리 집에 모여 술 마시다가 황당한 내기를 꺼냈던 친구가 누구였더라. 졸업하기 전에 누가 먼저 등단을 하는가, 그런 맹랑한 객기를 부리던 날이 있었다.

방학 중 온 학교 신문, 눈에 뜨인 글귀, “원고를 모집합니다. 채택된 원고는 소정의 원고료를…”

방바닥에 엎드려 빈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쓸까. 머릿속이 뒤죽박죽 풀리지 않는 실타래 같은 미로에 빠져 엉켜있었다. 에이~ 일어나서 바닷가로 나갔다. 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내 고향 법성포 작은 포구, 비린 내 풀풀 거리는 바닷가를 걷다가 돌아왔다.

방문을 열었는데 헉, 이게 뭐지. 첫 경험이었다. 백지, 흰 종이가 글쎄 “어서 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숨에 써지기도 했으며 끙끙거리는 병을 앓는 것처럼 고통과 신음의 날을 보내기도 했다.

원고를 보냈다.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 “아 나 조태일이라는 사람인데…” “네? 아 저… 그러니까 국토의 시인…” 시집에 나오는 세상의 그 어떤 시인도 한번 본적이 없지만 시인의 목소리도 또한 처음이었다.

정신이 없었다. 시를 보았다. 뭐라고 뭐라고 말씀 끝에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정신에 대한 산문을 20매 써서 보내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시인> 제 2집. ‘할메는 꽃신신고 사랑 노래 부르다가 외 7편’ 내 시가 실린 책이 왔다. 꿈이 아니지. 머리맡에 두고 펼쳐보고 또 펼쳐봤다. 꿈같은 날이 가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조태일 선생님이었다. 등단을 했는데 왜 서울에 한번 오지 않느냐고. 서울에 가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인사도 하고 얼굴도 봐야하니 한번 올라오라는 말씀에 방학이 되면 찾아뵙겠다고 했다.

큰누님 집에서 어렵게 받는 한 달에 15,000원의 용돈을 아껴 모은 돈으로 서울에 갔다. 버스를 타고 버스를 타고 물어서 찾은 곳, 덜커덩 덜커덩 굉음을 지르는 윤전기가 돌아가는 창제인쇄소, 덥고 비좁은 곳, 거기에서 나는 조태일 시인보다 먼저 김정환 시인을 처음 만났다. “아 네, 지울 수 없는 노래의 그 김정환 시인님…”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리부리한 조태일 시인과 밖에 나왔다. 여름 한낮, 마포 최대포 갈비집, 태어나 처음 갈비집에 갔다. 소주가 그렇게 달다니, 선생님께 물었다. 실리지 않은 산문에 대해 물으니 이 땅에서 시만 써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산문 실력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시인으로 살 수 있으며 어떤 올곧은 시인정신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으셨다는 말씀 끝에 산문이 형편 없었으면 등단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슴 철렁 쓸어내리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넙죽넙죽 술잔을 비웠다. 세상에 돼지갈비가 그렇게 맛있는 것이라니. 시류에 편승하거나 휩쓸리지 않는 시인이 되기를 부탁하셨다.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모 시인의 행보를 꾸짖으며 참된 시인정신에 대해 말씀하셨다.

시집 6권, 산문집 7권. 전업시인으로 살며 산문에서 받는 경제로 살아남았다. 2년 전 산문집 원고를 넘기며 앞으로 산문은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 쓰지 않았다. 등단기에 대한 이 글은 나의 오늘을 있게 해주신 조태일 선생님에 대한 생각으로 쓴 마지막 산문이다.

법성포 1

이제 한 세월 지나면

뻘밭으로 몰려남아

옛적 기억들만 퍼질나게 떠올릴

폐선장이 다 되어 온 법성포 앞바다

어릴 적

까마득히 솟은 걸대 이루 셀 수 없고

걸대들 마다마다 두름두름 말려놓은

가진 입이면 들어 아는 법성포 영광굴비

다랑가지 아재들이 칠산 조기 낚아다가

배떼기에 돋은 비늘 쓰억쓰억 긁어내고

아가리며 아가미에 염을 먹여 맛을 내다

빼갈보다 더 독하고 양주보다 더 좋은 놈

맥주 먹고 정종 먹던 입 한잔이면 나뒹굴을

토종이지 법성토종 말술로 털어넣고

밤을 새워 두름 엮어 걸대에 걸었네

그때 아재들 가슴 참 든든해 보였는데

이제 한 세월가고

뻘밭으로 몰려남아

아제들 똑딱배는 바다가 목마르고

폐선장이 다 되어도 법성포 뱃놈으로 남겠다는

아직 곧은 가슴은 넉넉해 보이는데

아제의 허허 웃음이 가난에 절었구나

아제의 허허 웃음이 가난에 절었구나

박남준 1984년 <시인> 등단.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등과 산문집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박남준 산방일기> <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등.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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