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⑪위선환] 1960년 등단, 40년 절필 후 ‘교외에서’로 재등단

[아시아엔=위선환 시인] 내가 용아문학상을 받고 시인이 된 것은 1960년 2월이다. 용아문학상은 1930년대에 <시문학(詩文學)>지를 발간하면서 정지용, 김영랑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고, <문예월간(文藝月刊)>, <문학(文學)>, <극예술(劇藝術)> 등 문예지를 발간하면서 시를 쓰다가 34세로 세상을 떠난 용아 박용철(龍兒 朴龍喆, 1904-1938) 시인을 기리어 제정했던 상인데, 1960년에 시상한 제1회 상은 시를 서정주와 박두진 두 시인이, 산문은 조연현 평론가와 김동리 소설가가 심사했었다. 나는 시로 뽑혔다.

시인이 되고 나서 햇수로는 10년, 그 1960년대에 나는 작품활동을 거의 못했다. ‘좋은 시’로 수상했던 내가 ‘좋은 시’를 외면하고 (당시로서는 더욱) 난해한 시를 쓴 것이 이유였다.

“도어를 밀면/소파에 등을 기대인 樹液質수액질 생성의 농도/죽음에 다정한, 보다 우울한 美미 안에서/나의 사랑이 성숙한 슈미즈의 갈등은/붕괴하고/어느 날 돌이 된 나의 눈에 박히어/이름 할 수 없는 예감이 되었다/그래서/無垢무구한 모든 것은 따뜻하고/나의 손끝에 닿는/하늘은/찬가/가면 오지 못하는/그러나 어디론가 옮아가는 事象사상을 위하여/나는 증여할 언어 하나 없다/소파에 기대인, 저러한 농도를 金금으로 굽던/햇빛이/사금파리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난 뒤//<그때 나는 지상에서 얻어온 빛으로 두개골의 구멍마다 불을 켜야지>//실내의 중심에서 손을 들고 일어선 純粹持續순수지속의/환한 육체, 사랑이여 /너는 나의 눈확 속에 뒹구는 사유의 돌조각.”-‘雅歌아가 1’(1963년 작) <수평을 가리키다>(2014. 문학과지성사) 수록

1960년대에 쓴 시 중에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시다. 수상 후에, 앞으로 쓸 시를 고민한 끝에 <다른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써낸 시가 이러했다. 그때에 나는 금기였던 관념이나 이런 저런 논의를 포함하여, 고운 언어와 단정한 어법을 강조하던 당시의 기준이나 언습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운, 오직 자유롭기만 한 시에 관하여 고민했다. 사상(事象)의 깊이에서부터 높이까지, 그리고 안과 밖을 하나로 드러내는 언어에 관하여 고민했다. 그 고민들이 여과 없이 표출된 내 시의 난삽함과, 언필칭 ‘난해시’에 대한 억압이 나에게 아픔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받았던 서정주 시인의 두 번째 편지글에서 당시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겠다. ‘위선환 군의 고오운 시를 읽고’ 라는 제목을 붙였던 첫 편지와는 달리, 두 번째 편지에는 “장래에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위선환 군과 같이) 어려운 시를 쓰겠지마는, 지금은 우리말을 잘 고르고 다듬어서 우리 정서에 맞는 쉬운 시를 써야 한다”고 지적하는 말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김현승 시인도 내 시를 읽고 염려하며 재촉도 했었지만, 결국 나는 두 시인이 원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그렇게 발표의 길이 막히면서 나는 소외되었고, 시적 성취에 대한 불안과 갈등으로 자학하고 폭음하고 문란해져서 껍질과 뼈가 맞붙도록 마르고,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는 등 심신이 아주 쇠약해졌으므로, 결심하고 시를 끊었다. 그때가 1969년의 연말이다.

시를 끊으면서 나는 가혹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아둔 성적통지표, 상장, 사진, 편지, 스케치 묶음, 이런저런 소품들, 스크랩 북, 시작 메모, 그리고 자작시들을 기입해둔 시작노트까지, 내가 시를 쓰며 살아온 흔적들을 모조리 태웠고, 서책을 내다 버렸고, 시로 맺어진 인연 또한 끊었다. 용아문학상 수상작도 그때에 탔다. 기실 나는 나를 태우고 버렸던 것이다.

시를 아주 잊고 지냈던 30년(1970년 1월부터 1999년 3월까지)이 그 다음에 자리한다. 그동안 공직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던 내가 외환위기로 단축된 정년을 하면서 문득 시를 쓰기로 작정하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1999년 4월이다. 그렇게 시를 다시 쓰는 2년을 보내고 나서 2001년 5월에는 첫 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를 <현대시>에서 출간했고, <다시 쓰는 시>로서는 처음 청탁을 받은 시, ‘郊外에서’ 외 2편이 <현대시> 2001년 9월호에 실렸다. 지금 나에게 ‘郊外에서’ 밖에는 나의 등단작이라고 내놓을 만한 시편이 없는 연유가 그러하다.

郊外에서

몇 걸음 내려서자 버스럭대며

겨드랑이나 가랑이 사이에 잎사귀들 묻힌다.

부러진 낫날 파묻고 가는 찬 들 바닥 여기저기에 낱알 같이 흘려있는 새 울음소리들.

가을에 부는 바람 끝은 어느 하늘에 닿아있는지,

그저 엎드리고 싶은, 죄보다 짙푸른 하늘복판에 몇 잎씩 가랑잎자국들 눌려있다.

몇 마리인지 일찍 떠난 새들이 지금은

하늘 숨죽은 높이쯤을 건너가고 있는 듯,

잰 발놀림은 보이지 않지만

환하게 드러난 허공의 등줄기를 밟아가며

점점이 발자국들 찍힌다.*

마지막처럼 아프다. 나는

*維摩經

위선환 2001년 <현대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수평을 가리키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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