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⑦정일근] 수배중 쓴 ‘유배지 정약용 편지’로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신춘문예’. 한때 이 네 음절만큼 문학도들을 설레게 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시나 소설 등을 통해 문학가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사 신춘문예는 시인이나 소설을 꿈꾸는 문학도들의 희망의 언덕이자 절망의 골짜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주요 일간지들은 시, 소설, 희곡, 평론, 시조 등의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를 통해 신인들을 대거 등단시켰다. <아시아엔>은 시전문 월간지 <유심>(편집고문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 발행인 겸 편집인 김도종)과 함께 ‘시인들의 등단 뒷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
[아시아엔=정일근 시인,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어려서부터 문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고등학교 시절엔 문예부장을 지냈다. 어려운 집안사정이었지만 꿈을 좇아 진학한 사범대학, 재학 중에 진주개천예술제 백일장 시 장원, 만해백일장 시 장원, 영남대 천마문화상 소설 당선 없는 가작, 고대문화상 시 당선, 시문학 대학생문예 가작, 한국문학 대학생문예 당선 등 이런 저런 입상을 하고, 대학 4학년 때 1984년 10월 당시 무크지였던 <실천문학>(통권5호) 신인작품에 ‘야학일기’ 등 7편의 시가 당선되어 열망했던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서 ‘악플’ 달리기 좋게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가 홍윤숙, 박재삼, 김현 선생님의 심사로 당선됐다. 그렇게 불과 두 달 사이 두 번의 시인이 된지, 어느새 서른 해가 지났다.
대학문단에서 얻은 얇은 명성으로 주위에서 다들 내가 신춘문예로 등단할 것으로 기대했다. 허나 <실천문학>에 등단을 위한 첫 투고 작품을 던진 것은 대학시절 내 현실의 반영이었다. 하지만 시인이 되고 단 한 장의 청탁서를 받지 못한 채, 신작시 한 편 발표하지 못한 채 나는 시위 주동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숨어든 곳이 거제 학동이라는 ‘모두가 가난하여 모두가 행복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학동 바닷가는 몽돌해변을 가지고 있었다. 낮에는 갈치 잡는 어선에서 잡일을 하고, 밤에는 몽동해변에서 자갈 쓸리는 소리에 취하거나,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암담한 미래가 불안했다. 급히 몸을 피하며 내 가방에 담아온 한 권의 책은 소설가 문순태 선생님의 <유배지>였다.
그 책 속에 소개된 다산의 전남 강진, 추사의 제주 대정 유배지를 당시 내 처지와 대입시키며 공책에 시를 써 나갔다. 내가 그곳에 숨은 것을 알게 된 대학문학회 후배가 약간의 생계자금을 챙겨오며 원고지와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공고를 오려왔다. 당시 한국일보 신춘문예는 모집부문을 시와 소설로 제한하고 다른 신문사보다 많은 상금을 걸었다. 그건 화려한 유혹이었다. 미래에 대한 탈출구를 찾듯 시를 정리했다.
학동에서 쓴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열일곱 살의 바다’ 등 5편의 시를 보냈다.
당선전보는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일보 1985년 1월1일자 신문에 지리산 운해를 담은 컬러사진과 함께 실린 내 시를 읽었다. 당선사고와 함께 당선자는 문화부로 오라는 안내가 있었다. 나에게 신춘문예 당선은 흔히 말하는 성탄 전후에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라 ‘새해 선물’이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첫 재학생 등단시인이었으며, 첫 신춘문예 당선자가 되었다.
당선축하 현수막 한 장 걸리지 않는, 축하해주지 않는 캠퍼스를 떠났지만 신춘문예 당선으로 모교인 진해남중학교 국어교사가 되었다. 취임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은사인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먹물이 많이 든 시인이니 그 대접을 하라”고. 편하게 근무하며 틈틈이 공부하여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됐다. 그 이야기는 지면이 주어지면 다음에 하자. 지난 2003년 모교는 나에게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는 ‘한마공로상’을 선물했다. 2010년부터는 학사출신인 나에게 정 교수란 과분한 직책으로 모교 강단에 세웠다. 학동바다의 몽돌이 파도 쓸리는 소리에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과 함께한 내 등단의 시간은 고통이었지만, 내 미래를 바꾸었다. 나는 그 ‘운명적인 사건’에 감사하며 산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제1신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 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을 예감했을까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宜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일부 수정)
정일근 1984년 <실천문학> 1985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방!>등. 시학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한국예술상 등 수상. 현재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청년작가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