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정약용이 밝힌 바람직한 국회의원의 조건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니 철새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이 한창이다. 저들이 과연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을 뽑으면 좋을까?? 4월 실시되는 20대 총선에서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에 뽑혔으면 좋겠다.

<논어> ‘자로편(子路編)’에 보면 공자께서 바람직한 정치인에 대한 문답이 나온다. “子路問政 子曰 先之勞之. 請益 曰 無倦.(자로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앞장서야 하고 위로해야 한다. 자로가 조금 더 말씀을 청하자 공자는 말했다. 게을러서는 안 된다)”

정치인이라 하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해야 하고 괴롭고 힘든 일은 자신이 감당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게으름 피워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특히 ‘노지(勞之)’라는 두 글자는 백성들에게 힘쓰고 노력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어렵고 힘든 일은 자신이 직접 담당하여 노력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공자 말씀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정치라고 한 것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편’(吏典編)의 속리(束吏) 조항에서 공자의 교훈을 인용하여 통치자나 정치지도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었다. 오직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바르거나 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도자가 바르다면 정치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별것이 아니다.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선출해주어야 바로 정치인이 되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 올바른 사람, 너그러운 사람, 진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사람, 백성들의 한없는 신뢰를 받는 사람을 고른다면 정치는 잘 될 수밖에 없다.

그밖에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정치인은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주의 두 가지 자질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화합과 통합’을 말했다. 우리 역사상 수많은 국민적 지도자가 출현했다가 사라졌고, 지금도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지도자가 회자(膾炙)되고 있지만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과연 누가 있을까?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부분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동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화합과 소통을 조화롭게 하지 못해 지도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현실적으로 마주치는 정치 현안 하나하나가 치열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복잡한 세력 간의 권모술수가 얽혀 있기 때문에 정치의 한계를 노정(露呈)하는 것이다.

학문만 하는 선비의 깨끗한 품성 속에 국민적 존경을 받고, 한편으론 추악한 현실정치 과정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하여 우호세력을 만들고 당권을 쟁취 하는 권력 투쟁에서도 성공해야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자질이 서로 양립하기 어렵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특성상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 한 측면에서만 강한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사람이 이러한 양면을 함께 겸비한다는 것은 어렵다. 한편으론 이러한 능력은 수많은 투쟁과 시련 속에 길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학(道學)을 공부하여 우주의 진리를 깨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하나가 전부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이치를 알 수 있다. 하나가 만법(萬法)이고 만법이 하나다. 그것이 원융(圓融)이고 원통(圓通)이다. 그 이치를 알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 중용(中庸) 중화(中和)의 정치를 할 수 있다.

극단의 정치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중도의 정치가 강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세계를 보면 중도의 정치, 연합의 정치를 강화한 쪽은 경제 문제와 사회 문제를 비교적 원만히 풀어가고 있다. 반면에 극단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는 모두 정체에 빠져 있다. 또 이 극단의 정치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뚜렷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된 한국사회는 이제 누가 일방으로 끌고 갈 수가 없다. 100% 만족을 줄 수도 없다. 여러 문제들을 동태적(動態的) 균형 속에서 파악하고 최대공약수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한국정치의 틀을 이렇게 바꾼다면 우리도 중도의 정치, 협의(協議)의 정치, 연합의 정치를 강화하는 쪽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대승(大乘)의 정치가 곧 중도정치다. 국민을 차별 없이 이끌어가는 중도의 정치라야 나라가 바로 고르게 된다. 그런데 이 ‘중도’는 막연한 가운데 중립이 아니다. ‘중도개혁정치’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그리고 관용과 함께하는 통합의 정치 철학을 말한다.

중도개혁이란 어느 한 쪽만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유층이든 빈민계층이든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사회·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협력과 배려, 합의의 사회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개혁적 정치사상이다. 대립하는 두 개의 계층이 있을 때,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중간층 또는 국민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정치라야 참다운 중도개혁정치라 할 수 있다.

극단의 중간이 중도가 아니다. 중도 안에 양 극단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양 극단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최대공약수를 산출해 내는 것이 진정한 정치가 아닐까 한다. 무엇이나 극하면 변고가 생기고 폐단이 생긴다. 극(極)과 과(過)에 치우치게 하지 않는 것이 구세(救世)의 요법이고 정치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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