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가계부채 1200조 시대’ 빚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세상에 빚이 없는 사람은 없다. 금전적인 빚만 빚이 아니다. 천지우로(天地雨露)의 덕이 빚이고, 스승의 가르침도 빚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도 빚이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빚이다. 또 더불어 의지하며 살아가는 동포(同胞)의 은혜도 빚이고,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는 법률(法律)의 은혜도 빚이다.

세상에 가득 찬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 빚을 갚을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빚을 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수많은 빚을 몇 개의 은혜로 집약을 한다면 아무래도 천지 은혜(天地恩)?부모 은혜(父母恩)?동포 은혜(同胞恩)?법률 은혜(法律恩)에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우리는 ‘사은(四恩)’이라 부른다.

이같이 따져보면 빚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오히려 빚 없는 사람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이 빚이 없기를 바라면 안 된다. 어차피 우리는 타고 난 그날부터 빚을 지고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몸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빚을 갚을까를 걱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박수(朴銖, 1864~1918)의 <중당유고>(中堂遺稿) 권1, ‘여김취오’(與金聚五)에 빚의 종류에 대한 글이 나온다. 그는 빚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상환을 전제로 남에게 빌린 물질적인 빚이고, 하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서로 신세지고 도움 받으며 사는 마음의 빚이다.

그러니까 박수가 말하는 빚은 마음의 빚인 동시에 자신의 책무다. 이 뜻은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야 하는 근원적인 빚을 지고 산다는 의미다. 그래서 박수는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 빚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 물질에 관한 빚도 가계부채의 팽창으로 국가 경제가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다. 자산이 되어줄 줄 알았던 부동산이 불과 20년도 안 되어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는 불건전한 가계 상태가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올해 가계부채가 1200조 원을 넘었다. 서민의 삶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 역시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럼 이 마음의 빚을 갚는 방법은 무엇일까? 달마(達磨, ?~528) 대사가 지은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는 그 마음의 빚을 갚는 방법이 나온다. “만일 수행자가 수행을 하다가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하면 ‘이는 내가 전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빚을 갚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렇게 생각하라 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누군들 없겠는가? 이런 일은 수행의 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달마대사의 말씀처럼 생각한다면 아무리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고 생각되니 덜 억울하고 괴로움도 덜할 것이 아닌지?

반면에 이유 없이 괴로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조그만 괴로움이라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괴로움을 달게 받는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세상사는 모든 일이 다 빚을 갚는 일인가?’ 그렇다. 세상에 빚만 지고 사는 사람도 없고, 보시만 하며 사는 사람도 없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빚을 갚는 것일 수도 있고 베푸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빚을 지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은혜를 베풀며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오늘은 빚을 지지만 내일은 갚으며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그런데 중생의 마음이라 “내가 하는 것이 빚을 갚는 것인가, 아니면 공덕을 쌓는 보시를 한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 때도 있다.

“빚을 갚는 것이냐 아니면 공덕을 쌓는 것이냐” 하는 것은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가 없다. 갚는 것이든 쌓는 것이든 모두가 다 인과(因果)의 법칙에 따르기에 받는 것도 베푸는 것도 내가 받고 내가 베푸는 것이다. 갚는 것이라 생각하든 공덕을 쌓는 보시행이라 생각하든 인과의 법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갚는 것이면 갚아지는 것일 것이고, 보시한 것이면 공덕이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 갚으면 더 갚을 일이 없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과보를 달게 받는 것이다. 이를 감수불보(甘受不報)라고 한다. 내가 고생하며 베풀어주고도 별로 고맙다는 인사도 받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부족하다는 질책을 받는다면 이는 빚을 갚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 무상보시(無相普施)를 하는 것이다. 조그마한 공덕과 보시를 베풀어도 베푼 것 이상의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면 이는 내가 공덕을 쌓은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현재의 인과가 그렇듯이 전생을 포함한 삼세를 통해 일어나는 인과에 있어서도 똑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만일 빚을 갚는 경우라 생각될 때 빚을 받아 가는 사람이 너무 당당하다고 해서 억울하다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옛날 빚은 갚으면서 새로운 업(業)을 일으키는 것이 되어 미래의 괴로움의 원인을 심게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갚는 빚이라면 달게 갚고 다시 빌리지 않으면 과보를 받을 일이 없다. 그리고 이왕 복을 지으려면 상(相) 없이 베푸는 것이다. 그럼 업은 사라지고 공덕만 쌓인다.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生滅)없이 길이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된다. 이것을 만고(萬古)에 변함없는 상도(常道)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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