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사랑고백 최고 수단 ‘쪽지’를 아십니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쪽지 한 장의 위력을 아십니까? 학창시절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만나면 두근대는 가슴을 전달할 길이 없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 있는 것도 아니고 마주 보고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고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다. 그때 유용한 수단이 바로 쪽지였다. 동네 꼬마들을 시켜 전달하기도 하고 몰래 가방 속에 쪽지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쪽지의 답장으로 무시당하거나 거절 답장이 올 때는 참으로 난감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쪽지가 성공하여 데이트에 성공이라도 하면 마치 하늘을 날듯한 기분이었다.
쪽지의 위력이 비단 젊은 시절 연애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쪽지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된 사례는 어떤 것일까? 낡아서 못 쓰는 자전거가 버려지는 곳이 있어서 담당 공무원이 무척 골머리를 앓게 됐다고 한다. 그는 머리를 썼다. 거기에 이런 쪽지를 붙여두었다. “이곳은 훔친 물건, 장물자전거 보관소입니다.” 그러자 더 이상 고물자전거를 불법으로 버리는 사람이 없어졌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전거를 누가 훔쳐갔다. 50대 중년 영국 간호사 에일린 레메디오스는 애지중지하던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자전거가 아주 고급품이 아니었기에 왕진을 나갔다가, 환자 집 밖에 무심코 세워뒀는데 나와 보니 없어진 것이다. 자전거가 꼭 비싸서가 아니라 비록 볼품없이 낡았지만 화가 치밀었다. 절친한 친구가 선물해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간호사 에일린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누군가 술에 취해 잠깐 빌려 간 것이려니 생각하자’ 이런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는 도난당한 지점의 가까운 기둥에 농담조의 쪽지 하나를 붙여놓았다. “부탁입니다!! 제 자전거를 돌려주세요. 사랑만 받아왔기 때문에 주인이 없으면 몹시 무서워해요.”
그 이튿날, 큰 기대 없이 그 장소에 다시 가본 자전거 주인은 깜짝 놀랐다. 거짓말 같이 자전거가 돌아와 있었다. 자전거는 마음을 고쳐먹은 도둑의 사과 편지와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났다. “정말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다만 자전거는 학대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고쳐먹은 도둑으로부터”
그녀도 다시 답장 쪽지를 붙여놓았다. “제 자전거를 빌려갔던 다정한 분께! 정말 감사합니다. 자전거가 저한테 돌아와서 기쁘다고 말하네요. 즐거운 시간 보냈다고도 하구요.” 이렇게 작은 종이조각에다가 짧은 글을 쓴 것이 세상을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한다.
대부분 쪽지에 대한 추억이 있을 거다. 그냥 말로 건네기는 쑥스러워 용기가 나지 않는 경우는 꼭 데이트 신청뿐이 아니다. 소규모 개인사업을 하는 남편이 점심값마저 줄인다며 도시락을 싸들고 나간 날, 아내는 그 안에 이런 쪽지를 넣어뒀다. “훌륭한 지아비인 당신! 맛은 모르겠지만 음식재료는 모두 애정이니 불끈 기운 내길 바랄게요!” 잘 쓴 쪽지 한 장, 수십 장 글보다 힘이 더 세다.
다퉈서 마음 상한 친구와 쪽지를 주고받아 다시 화해를 하기도 했고, 아빠께 엄마 모르게 특별 용돈을 부탁할 때도 쪽지에 간단하지만 애절한 사연을 적으면 해결이 되곤 했다. SNS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저는 18살에 키가 좀 큰 덩치가 살짝 있고 외모는 그냥 준수합니다. 제가 어느 날 홈플러스에서 일하는 누나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고백을 하려 하는데 도저히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여러 연애고수 선배들이 이 청년에게 댓글로 용기를 주고 방법을 제시해줬는데,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쪽지’를 쓰라고 권했다. 나 역시 쪽지로 멋진 연애를 한 경험이 있다. 육군 병장으로 대구병무청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병무청장 비서로 미스경북 출신 팔등신 미녀가 부임했다. 난리가 났다. 많은 장교, 일반직 공무원들이 저마다 그 비서에게 데이트를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가만히 보니까 그 꼴이 아니꼽기도 해 나도 입후보를 했다. 그런데 육군 졸병으로서는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매일 아침 조회 때 멀리서 그녀에게 강력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심히 지냈는데 며칠 지나니까 눈이 마주치게 되었고, 또 며칠 지나니까 목례를 보낼 정도로 발전했다. 약간의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쪽지를 썼다. 그리고 결재 판에 쪽지를 넣어 비서실로 들어가 타이핑을 부탁했다.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결재판을 열어보더니 쪽지만 자기 서랍에 넣고 공문 타이핑을 해주었다.
점심시간에 그녀가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녀가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그런데 내 앞에 오더니 예쁘게 접은 쪽지 하나를 남 모르게 내 책상에 슬쩍 던져 놓고 사라졌다. 너무 기쁜 나머지 사람들 눈을 피해 그 쪽지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 펴 보았다.
“김 병장님! 대구지리도 잘 모르실 텐데 어떻게 만나려 하십니까? 일과 후, 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몇 번 버스를 타고 몇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시면 무슨 빵집이 있습니다. 퇴근 후 거기서 뵙겠습니다.”
그 환희(歡喜)! 뛸 듯이 기뻤다. 마침내 육군 병장이 막강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팔등신의 미인을 연인(戀人)으로 만든 것이다. 인연(因緣)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인연으로 만난 것이 아니다. 전생 아니 몇 겁(劫)인지도 모를 생에 서로 다정하게 지내던 사이였던 것이다. 그 인연이 여기서 만나 시절인연이 활짝 꽃을 피운 것이다.
인연도 가꾸는 것이다. 좋은 인연도 그냥 대하면 시들해 진다. 연애하듯이 주고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