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원한 스승 조만식’ 칼럼을 넉달만에 바로잡는 까닭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필자는 지난해 10월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高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에서 나는 고당을 남의 집 ‘머슴’ 출신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글을 읽을 ‘고당기념사업회’ 조연수 선생께서 “고당 선생은 머슴 생활을 하신 적이 없다”면서 <민족의 영원한 스승 고당 조만식 전기>를 보내주었다.

내 글 또한 어느 분이 보내온 자료를 보고 쓴 것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고 무식한 내 처사와 자료를 확인하지 못한 부주의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 다시 한번 고당 조만식 선생을 조명하고 내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고당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 그리고 정치인이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이후 상업과 종교 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으로의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고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고당은 일제 강점기 하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 민간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했다. 특히 물산장려운동과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 아호는 고당, 본관은 창녕이다.

1945년 8월 15일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한국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맡았다. 그 해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전쟁 중 김일성 측근세력에 의해 살해된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다.

이렇게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를 머슴으로 표현한 대목을 다시 살펴본다.

“여기 지극한 정성을 다한 한국과 미국의 머슴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 머슴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이 있었지요. 눈에는 총기가 있고, 동작이 빠르고 총명한 청년이었습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했습니다. 그는 아침이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려 다시 안방에 들여놓았습니다. 주인은 이 청년을 머슴으로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그 청년을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청년은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요강을 씻어 숭실대학에 간 그가 민족의 독립운동가 바로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님이십니다. 후에 사람들이 물었지요. ‘머슴이 어떻게 대학에 가고 선생님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었냐?’고요. ‘주인의 요강을 정성들여 씻는 정성을 보여라.’ 그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남의 요강을 닦는 겸손과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아량, 그리고 지극정성! 바로 그게 조만식 선생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고당 조만식 전기> 24쪽에 보면 고당은 가난하여 남의 머슴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아주 유족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한번 살펴보자.

“고당이 평양에서 출생 했을 당시의 가세(家勢)는 유족한 편이었다. 아버지 조경학은 고향 강서에 있을 때 집안 이이들을 모아서 글방을 차리고 직접 훈장이 되었다. 이렇게 일찌감치 청소년 교육에 손을 대는가 하면, 이재(理財)에도 눈이 밝은 편이었다. 평양으로 이사 온 초기에는 어느 상점에서 서사(書士)노릇을 한 적이 있었다.

회계에 자신을 얻자 물산객주(物産客主)로서 위탁 판매업을 직접 운영하여 아들에게 비교적 풍족한 유산을 남겼다. 그 덕으로 고당은 일생 동안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고, 평생 무보수로 사회단체에 봉사할 수 있었으며, 애국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재까지 털어 민족운동과 사회활동에 전념하느라 재산은 계속 줄어들었다. 더욱이 해방되기 10년 전에는 느낀 바 있어 소작인들에게 주었던 토지의 대부분을 처분하기도 했다.”

“고당은 3 ? 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에 오산학교 교장 직을 사임했다. 4년간에 걸쳐서 초창기의 교풍을 확립한 그는 3?1운동을 치른 뒤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를 총지휘하던 남강 이승훈과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비밀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독립선언을 하면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시각에 평양에서도 만세운동이 돌발했다. 평양시민들이나 일본관헌도 전혀 모르는 가운데 평양의 두 군데서 동시에 궐기 했던 것이다. 한 곳은 장대현교회 옆에 있던 숭덕학교 교정이었고, 다른 장소는 남산현교회 뜰이었다.”

“세상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마하트마 간디에 비긴다. 두 지도자가 다 같이 비살생,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을 민족해방과 조국 독립 방안의 기본원칙으로 했고, 특히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인도의 간디’로 생존하기보다 ‘조선의 조만식’으로 생명을 유지하기는 몇 곱절 힘든 일이었다.”

위대한 민족의 스승을 몇 줄의 글로 다 표현할 길은 없다. 가슴 벅차다. 우리에게 이런 스승이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자랑인 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나라에는 이런 위대한 지도자가 안 계신 것일까?

위대한 지도자가 어떻게 ‘머슴’으로 표현되는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부모님의 요강을 닦는 효행과 겸손, 그리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아량, 지극정성을 표현한 ‘민족의 영원한 스승’을 기리다가 나온 오류가 아닐는지?

잘못된 자료를 인용해 조금이라도 고당의 위대성에 누를 끼친 것 같아 유감을 금할 수는 없다. 이번 기회에 고당 선생을 제대로 알게 도와주신 고당기념사업회 조연수 선생께 사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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