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정성이 당신 운명을 바꿉니다···조만식 선생과 가필드 美대통령을 알아본 혜안은 바로 ‘정성’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세상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일까? 아무래도 정성(精誠)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은 좋은 발심(發心)을 하고서는 정성이 부족해 중도에 그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참으로 안타깝다. 정성만 있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데 말이다.
성(誠)이란 무엇일까? 그 정성을 <중용>에서 간결하면서도 정묘하게 설명한 것이 있다.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참된 것은 하늘의 도이고 참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다.)’ 성(誠)을 참다움이나 성실, 정성 등으로 해석하여 언어적 글 뜻에 치우치고 보면 단지 도덕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주자(朱子)는 “성(誠)은 진실무망(眞實无妄)한 것”이라 하여 천도(天道)가 존재하는 의의에 편승한 해석을 내놓았고, 정이천(程伊川)은 “진실무망(眞實無望)하여도 올바른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면 진실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주자는 성(誠)의 본질을 간파하였고 정이천은 인간의 성찰을 각성(覺醒)한 것이다.
그런데 <중용>에서 공자가 설파한 천(天)은 ‘상제(上帝)’ 곧 신(神)이다. “성(誠)은 하늘의 도이므로 성지(誠之), 즉 하늘의 도를 행하는 것이 사람의 도”라고 했다. 이 말씀으로 중용에서의 성(誠)의 본질은 잘 파악된 것이 아닐까? 따라서 중용에서는 ‘지성여신’(至誠如神)이라 하여 성이 지극하면 신과 같다고 했다.
지성(至誠)이라는 것은 이와 같이 사람이 행하는 하늘의 도를 말한다. 얼마만큼 하늘의 도에 이르렀는가 하는 경지에 따라 앞 일을 미리 알 수가 있다고 했다. 즉 선(善)을 행한 자는 선한 길조(吉兆)가 있게 되어 미리 알 수 있고, 선하지 아니한 행위를 한 자는 그 흉조(凶兆)가 미리 있게 되는데, 지성(至誠)이 신과 같다는 것은 신이 그렇게 알려준다는 뜻이다.
‘지성여신!’ 곧 지성이 신인데 정성만큼 위대한 것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30여년 전부터 이 지성여신을 지성여불(至誠如佛)로 고쳐 부르고 행동철학으로 삼아왔다. “정성이 곧 부처다. 성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것이다.” 정말 공부와 사업에 지성여불 정신으로 30여년 일직심 그대로 죽기 살기로 달려 왔다고 나름 자부한다.
여기 지극한 정성을 다한 한국과 미국의 머슴 이야기가 있다. 먼저 우리나라 머슴 얘기다. 평안북도 정주에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이 있었다. 눈에는 총기가 있고, 동작이 빠르고 총명한 청년이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쓸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했다. 그는 아침이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씻어서 햇볕에 말려 다시 안방에 들여놓았다.
주인은 이 청년을 머슴으로 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그 청년을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시켰다. 공부를 마친 청년은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요강을 씻어 숭실대학에 간 그가 민족의 독립운동가 바로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3~1950) 선생이다.
후에 사람들이 물었다. “머슴이 어떻게 대학에 가고 선생님이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었냐?”고. “주인의 요강을 정성들여 씻는 정성을 보여라.”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남의 요강을 닦는 겸손과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아량, 그리고 지극정성, 바로 그게 조만식 선생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음, 미국 머슴 이야기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터지기 몇 해 전 일이다. 오하이오주의 대농 부호인 테일러(Worthy Tailor) 농장에 한 거지 소년이 들어왔다. 17살 ‘짐’이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이 집에서는 그를 머슴으로 고용했다. 이 소년 또한 지극정성으로 일했다. 그러나 3년 뒤, 주인은 자기의 외동딸과 짐이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을 알았다. 테일러씨는 몹시 노하여 짐을 빈손으로 때려서 내쫓았다.
그후, 35년이 지나 낡은 창고를 헐다가 짐의 보따리를 발견했는데 한 권의 책 속에서 그의 본명을 찾았다. ‘James A. Garfield’ 바로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었다. 그동안 짐은 히람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육군 소장을 거쳐 하원의원에 여덟 번 당선된 후, 마침내 백악관을 차지한 것이다. 바로 지성여불의 정신으로 일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지성이 곧 신인데 어찌 자신의 서원(誓願)을 이루지 못할 일이 있을까? 원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 기도도 마찬가지다. 무얼 이루고자 하는 것이 기도 아닌가? 기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성’이다. 정성스런 마음이 곧 기도다. 나의 마음이 얼마만큼 정성스러운가에 따라 그 기도가 업장(業障)을 녹이는 것이다.
매일 같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습관처럼 절을 하고 염불하며 경전을 독송한다. 그러나 매일 똑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안 된다.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살아있는 기도가 된다. 공경스런 마음, 정성이 담긴 마음이 기도다. 모양새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무슨 기도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정성이다.
큰 도를 이루려는 사람과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짧은 시일에 속히 이루기를 바라면 안 된다. 잦은 걸음으로는 먼 길을 가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으로는 큰 도를 이루기 어렵다. 낙락장송도 작은 싹이 썩지 않고 여러 해 큰 결과이고, 불보살도 처음 발원을 퇴전(退轉)하지 않고 오래 오래 공을 쌓은 결과다.
정성이 곧 부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