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인생]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 생각나는 계절에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우리가 한 순간을 만났어도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자주 만나도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있다. 내가 필요할 때 언제나 달려오는 사람이 있고 불러도 대답 없는 사람이 있다. 내가 잘 나갈 때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내가 어려울 때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 이름만 생각해도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못내 아쉬워 눈물짓는 사람도 있다.
서로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란 걸 가끔은 잊을 때가 있다. 등잔 밑이 어두워서 그럴까? 너무 가까이 있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쳐 버리고 있는 소중한 인연, 사람의 관계란 서로 관심을 가지면 인연(因緣)이 되고, 그 인연에 공을 들이면 필연(必緣)이 된다.
인연이란 무엇이고 필연은 무엇인가? 인연은 불교 용어다.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인 직접적 원인,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의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고, 햇빛·공기·수분·온도 등은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다.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 내가 밥을 먹었는데 남이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연이라는 것은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뜻이다. 우주나 지구, 만물의 창조도 당연히 원인이 있다.
우주가 공(空)한 것 같아도 그 속에는 원리가 있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용하게 되어 있다. 자그마한 욕망이라도 그것이 원인이 되고 다양한 조건들이 연이 되어 인연을 이루게 되며 이것이 다시 원인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인연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온 우주가 이렇게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그것을 중중무진연기법(重重無盡緣起法)이라고 한다.
고타마 붓다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을 깨우치셨다. 그래서 우연은 없다고 하셨다. 모두가 인연이고 필연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인연을 만나고 맺어야 한다. 인연을 잘못 만나면 인생이 고달프다.
인간관계가 세 번 만나면 관심이 생기고, 여섯 번 만나면 마음 문이 열리며, 아홉 번 만나면 친밀감이 생긴다고 한다.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 만나 좋은 사람으로 헤어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소태산(少太山) 부처께서 득도한 이듬해 어느 날 제자 팔산(八山) 김성섭을 데리고 영광읍에 장 구경을 나갔을 때 일이다.
어떤 점포에 들러 잠깐 쉬는 동안 그 주인에게 물었다. “이 집에는 안주인이 없는가?” “예, 소시(少時) 이후로 여자만 얻으면 몇 달도 못 살고 나가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몸으로 곤궁히 지냅니다.” “내가 좋은 여자 하나를 골라 줄 터이니 살아보려는가?” “예, 그렇게 하여 주시면 감사하기 그지 없겠습니다.”
소태산 부처께서 그 집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집에 들어와 쉬고 가는 한 여자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대, 바깥양반이 있는가?” “예, 생이별하고 혼자 지냅니다.” “그래? 그럼 이 집 주인하고 같이 살면 어떠하겠는가?” 그 여자가 처음에는 대경실색하고 거절하더니, 나중에 그 남자 주인을 대면하고 나서는 살아볼 뜻을 보였다.
소태산 부처께서 그 남녀를 한자리에 불러 앉히고 말했다. “내가 두 사람에게 옛 이야기를 하나 하여 줄 터이니 들어보라.” 그리고는 말씀을 이어갔다.
옛날 깊은 산속에서 수꿩과 암꿩이 재미있게 살다가 죽었는데 그 후로 두 꿩은 차차 좋은 몸을 받아 마침내 둘 다 사람 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둘은 다 서로 좋은 인연을 얼른 만나지 못하고 반평생을 아들딸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전생 인연을 만나 다시 부부가 되어가지고 재미있게 살게 되었지.
두 사람은 소태산 부처의 말씀을 듣고는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함께 흐느껴 울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인연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니 이 말을 깊이 명심하라.” 그리고 소태산 부처께서 그 집을 나오며 김성섭에게 말씀했다. “그대는 오늘 내가 이야기한 뜻을 알았는가?” “그 두 사람이 전생에 꿩 내외라. 자기들 전생 일을 말해 주었더니 그렇게 흐느껴 우는 것이다. 사람의 영생에 인연작복이 제일 큰 일이 되는 것이니 명심하라.”
인생을 살아가고 특히 무엇인가를 하고자 할 때에 상생(相生)의 이치에 맞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인생을 얼마나 순탄하게 또는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아가느냐는 나의 의지와 노력 못지않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인연이다.
인연 중에는 사람의 인연, 특히 부모 형제 자식의 혈연(血緣)도 중요하지만, 영생을 통해서 볼 때는 진리의 스승이나 도반과 같은 법연(法緣)이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인연 중에는 나와 상생으로 도움이 되는 선연(善緣)이 있고, 상극(相剋)으로 방해가 되는 악연(惡緣)이 있으며, 상생이나 상극의 관계도 아닌 그저 그런 무기연(無記緣)도 있다.
우리는 개인적인 수행 못지않게 인연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생의 선연은 계속해서 좋은 인연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고, 무기연은 물론 상극의 악연도 되도록이면 좋은 인연 즉, 선연으로 바뀌도록 하지 않으면 영생이 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