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깊은 ‘정’···1200년전 최치원과 두 여인의 슬픈 ‘연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정(情)과 사랑은 인간의 행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인간의 선택과 결정의 대부분이 정과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정과 사랑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성격과 역할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과 사랑, 어느 쪽에 중심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의 모습과 결과에도 큰 차이가 있다.

정이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사전적 의미는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느끼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풀이한다.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정은 인간본성, 수양, 인품, 인간관계, 정서와 개성, 감정에 이르는 폭넓은 의미를 가진다. 정은 인간본성과 관련된 사회 윤리적이고 심미적이며 순수한 감정이다.

처음 인연을 맺고 모든 것을 다 줄듯이 정을 주고받다가도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날 때는 정 때문에 여간 가슴앓이를 하는 게 아니다.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는 정을 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정을 주는 이내 몸을 어이하면 좋을까 싶다.

두 여인의 영혼과 정을 나눈 신라의 수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년~?)의 일화 중 ‘쌍녀분(雙女墳) 설화’가 있다. 최치원은 열두 살 때 서쪽 당나라에 유학했다. 874년(당 희종 원년) 당나라에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한 수재다.

그후 20세 되던 876년 율수현위(?水縣尉)를 제수받았다. 그러다가 현(縣)의 남쪽에 있는 초현관(招賢館)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관의 앞 언덕에 있는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을 보고 ‘석문시(石門詩)’를 지어주고 외로운 혼백을 위로했다.

“어느 집 두 여인이 버려진 무덤에 남아/ 쓸쓸한 저승에서 봄을 얼마나 원망하였을꼬./ 그 모습 시냇가 달에 부질없이 남아 있지만/ 그 이름을 무덤가에 쌓인 먼지에게 묻기 어렵구나./ 고운 그대들을 혹 그윽한 꿈에서라도 만날 수 있다면/ 기나긴 밤 나그네를 위로한들 어떠하리오./ 쓸쓸한 객사에서 비와 구름 같은 만남을 이룰 수 있다면/ 그대와 함께 낙신부(洛神賦)를 이어서 부르리.”

여기서 ‘낙신부’는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이 쓴 것으로 중원에서부터 대대로 전해지는 유명한 문장이다. ‘낙선부’는 조비와 조식 형제가 서로 싸우던 중 아름다운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최치원이 시를 짓고 관아에 돌아오자 달이 밝고 바람이 좋은데 문득 아름다운 여자가 손에 붉은 주머니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시를 지어준 무덤에 살고 있는 팔낭자(八娘子)와 구낭자(九娘子)의 하녀인 취금(翠襟)이라는 여인으로 두 낭자가 보답하는 선물이라며 글귀가 쓰인 붉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 가운데 첫 번째 것을 펴보니, 거기에는 ‘팔낭자’가 최치원에게 보답하고자 쓴 시가 들어 있었다.

“죽은 넋 이별의 한은 외로운 무덤에 스며있지만/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눈썹에는 오히려 봄이 깃들었구나./ 학 타고 삼도(三島) 가는 길 찾기가 어려워/ 봉황 비녀 헛되이 구천의 먼지에 떨어졌네./ 세상에 있을 때는 내내 나그네가 부끄러웠는데/ 오늘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嬌態)를 품었구나./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시구(詩句)가 내 마음 알아주니/ 한 번은 고개 들고 또 한 번은 마음 상하네.”

곧 이어 펴본 두 번째 주머니에는 ‘구낭자’의 글이 담겨 있었다.

“오고가는 어느 누가 길가의 무덤을 돌아볼까/ 난 새의 거울과 원앙의 이불에는 먼지가 엉겨 붙었네./ 한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은 하늘의 명령인 것을/ 꽃피고 꽃 지는 세상은 벌써 봄이로구나./ 매양 진녀(秦女)처럼 세상 내버리기만을 바라/ 임희(任姬)처럼 아름다운 사람 사랑하는 일은 배운 적이 없도다./ 양왕(襄王)을 모시고 운우(雲雨)의 꿈을 꾸려하나/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만 상하는구나.”

뜻하지 않은 사랑의 고백을 받은 최치원이 기뻐하여 뜨거운 사랑의 메시지를 시로 읊어 ‘취금’이라는 하녀에게 써 보냈다. 취금이 시를 가지고 사라지자 잠시 후 문득 향내가 나며 두 여자가 손에 연꽃을 들고 들어오는데, 고운이 꿈인가 놀라고 기뻐하며 시를 짓고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다.

그들은 율수현(?水縣) 초성향(楚城鄕) 장씨(張氏) 집안 딸로 언니가 18세, 아우가 16세였을 때 각각 소금장수와 차(茶)장수에게 시집을 갔다. 두 낭자는 이 혼처가 불만스러워 우울하게 보내다가 요절했으며, 오늘 최치원을 만나 심오한 이치를 논하게 되어 다행이라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술을 권하며 달과 바람을 시제(詩題) 삼아 시를 짓고, 하녀 취금의 노래를 들으며 즐겼다.

참으로 애달픈 사랑 아닌가? 원하지 않는 사랑, 그리고 원하는 사랑을 찾으려는 세상과의 이별. 최치원은 두 여인의 삶과 죽음이 안타까워 가슴이 아렸다. 날이 새자 두 낭자는 놀라며, 천년의 한을 풀었다고 사례하며 두 여인이 각각 시를 지어주니 최치원이 눈물이 흐르는 줄 깨닫지 못하였다.

“북두성이 한 바퀴 돌고 물시계 소리도 드문데/ 이별 인사를 하려니 눈물 줄줄 흐르네./ 이제 다시 천 년의 한이 맺혔으니/ 오야(五夜)의 기쁨을 다시 찾을 수 없겠구나.”

“기운 달이 창을 비추니 붉은 얼굴은 차가워지고/ 새벽바람이 소매를 갈아먹으니 어여쁜 얼굴은 찡그려지누나./ 당신과 헤어지려니 걸음마다 애간장이 끊어지고/ 비가 흩날리고 구름마저 돌아가 꿈에 들어가기도 어렵겠네.”

사랑이 깨지면 깨진 상처라 곧 아물지만, 정이 꽂히면 빼낼 수 없어 계속 아프다. 정에 멍든 이내 몸을 어찌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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