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성(茶聖) 센노 리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우정’ 갈라놓은 한마디는?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編)에 이런 글이 나온다. “새가 죽으려 할 때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기 마련이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 이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이렇게 설명한다. “새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슬프게 우는 것이지만 사람은 궁색한 처지에 놓이면 본디의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는 말이 착한 것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에 증자(曾子, BC 505~435년)라는 분이 있다. 증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가(儒家) 사상가로 원래 이름은 증삼(曾參)이다. 증자는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증자가 병이 들어 맹경자가 문병할 때의 일이다. 그때 맹경자에게 한 말이 “새가 장차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니라” 했다고 한다.
증자의 이 말은 사람의 임종에 하는 말이 진실됨을 말할 때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음에 임해 선한 척하는 것은 위선이며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죽음에 임한 새의 울음이 슬픈 것은 가식이 없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에 임해하는 말이 선한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렇기기 때문에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까지 위선과 가식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느낄 때 인간은 순수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날’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나 하기는 쉽지만 이렇게 살아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매일매일 내 생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처럼 산다는 것은 자기의 인생을 최고도의 성실과 정열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한없이 진지한 인생의 자세가 아닐까? 오늘이 나의 인생의 최초의 날이라고 생각해 보면 큰 희망과 많은 기대와 진지한 계획과 더할 수 없는 충실감 속에서 하루의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매일이 이생의 최후의 날이라면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요 잘 해보려고 애쓸 것이다. 또한 빈틈없는 마음과 절실한 감정과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나의 하루를 살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사는 인생의 열애자(熱愛者)가 된다. 또한 모든 일에서 깊은 의미를 찾고 일분 일초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마치 영원히 계속할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동시에 마지막 날이다.
절대로 두번 있을 수 없는 오늘이다. 내일은 내일이지 결코 오늘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성실과 정열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또한 내 인생은 남이 살아 주지 않는다. 인생 최후의 날을 슬피 우는 새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담담하고 의연하게 갈 것인가?
일본 춘추전국 시대 센노 리큐(千の利休)라는 다성(茶聖)이 있었다. ‘오카쿠라 덴신’의 <차 이야기>에 이 센노 리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얘기가 나온다. 이 두 사람의 교우(交友)는 오래된 것이었다. 위대한 무장이 다인(茶人)에게 보여준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와의 우정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다. 센노 리큐가 말차(抹茶)에 치사량의 독을 넣으려 한다는 누군가의 속삭임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센노 리큐의 처형을 명한다. 그래도 자결의 명예가 우정의 징표로 베풀어졌다.
최후의 다회(茶會)가 열리는 날, 슬픔에 젖은 손님들이 약속 시간에 정원의 기다림 공간인 마치아이(待合)에 모인다. 마치아이와 다실을 잇는 좁은 통로 노지(露地)는 정갈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고, 양옆 나무들은 서로 잎을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진기한 향내와 함께 손님들이 안으로 청해졌다. 어둑한 다실 정면의 도코노마(床の間)에는 세상의 헛됨을 설파한 고승의 걸개그림이 걸려 있었다.
주인은 손님 한명 한명에게 차를 타주었고, 마침내 최후의 잔을 스스로 마신 후 자신의 다구(茶具)와 걸개그림을 손님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 그러나 찻잔만은 자기 앞에 남겨두었다. 그러고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에 두번 다시 다른 사람이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그것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 단 한명이 남았을 때, 그는 다회의 옷을 벗어 다다미 위에 단정히 접어놓고, 순백색의 자결 복장으로 갈아 입었다. 이어서 피를 토하듯 시 한수를 읊고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번쩍이는 칼날을 자신의 몸에 겨눈다. 섬뜩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잔혹미학과 아울러 인생 최후를 장엄하게 마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다성(茶聖) 센노 리큐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오래된 것들이 새것이나 화려한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의 실천자였다. 이 정신은 물질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불필요한 모든 것을 비워내고 덜어낼 것을 종용한다. 방의 진짜 아름다움은 천장과 벽으로 이루어진 빈 공간 안에 있으므로 공간을 최대한 비워두어야 하고, 건축의 소재는 최대한 소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어 있음을 도(道)의 참모습으로 생각했던 것은 노자(老子)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린 가운데 인생의 부침과 운명을 그냥 쓸쓸하게 받아들이는 일본인 특유의 무심함은 선불교의 정신이기도 하다. 필자 또한 선한 말을 쏟아내며 센노 리큐처럼 장엄하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갖가지 책, 다구(茶具), ‘덕산재’에 걸려있는 여러 그림과 사진들이 꽤 된다. 내가 떠나기 전, 이 빈약한 소장품들을 사랑하는 덕화만발 가족들에게 고루고루 나눠드리고 싶다. 누구라도 덕산재에 미리 오시어 소용되는 물건들을 점찍어 두시라.
인생 최후를 맞이하며 ‘슬피 우는 새’는 되지 말아야 한다. 부지런히 적공 적공 대적공하여 센노 리큐 같은 최후를 장식하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