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마조선사와 김정빈 작가의 ‘道’ 이야기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세상에 제일 어려운 일은 아마도 경계(境界)를 당할 때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는 일일 거다. 김정빈 작가가 쓴 구도소설 <도>(道)에 보면 주인공 노대행(盧大行) 스님이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평상심이 바로 도라는 말을 듣고, 그 평상심을 기르기 위해, 밤마다 공동묘지를 배회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던 어느 궂은 날 밤 마침내 무덤 사이에서 뛰쳐나온 귀신을 만난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기절했을 지경이다. 소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귀신을 향해 일갈한다. “네가 귀신이면 썩 앞으로 나서라! 네가 귀신이면 너한테는 내가 귀신이다.” 당찬 소녀는 그로부터 수행을 계속해 어떠한 난경에 처하더라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 도를 성취했다.
평상심 시도(平常心 是道)라는 말은 한 승려가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 709∼788)에게 어떤 것이 도인가를 물었을 때 “평상심이 바로 도”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세상 사람은 도라고 하면 특별한 것 또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도란 바로 범부가 일상생활을 하는 그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도라는 얘기다. 불가(佛家)에서는 ‘평상심시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도의 궁극적인 경지와 수행의 과정을 이 평상심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이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진리(眞理)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일상의 삶이 도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삶에서 진정한 정도(正道)와 중도(中道)란 우리 모두가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인 것이다.
마조는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이것을 일러 곧 평상심이라 했다. 일부러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고 버리지도 않고, 죽으면 끝으로 단절된다거나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평상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염 안 된 본래 마음이 곧 평상심이고 불도(佛道)라는 얘기다.
도를 닦는다 함은 수행을 말한다. 아마도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을 거다. 심지어 목숨 걸고 수행해야 하고, 수행만이 살 길이라는 말도 들어왔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오던 수행은 이처럼 끊임없이 혹독한 수행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본다. 수행을 잘 하는 사람 앞에서 위축되기도 하고, 수행을 못하고 근기(根機)가 낮은 자신을 탓하기도 하면서 상대방과의 비교 속에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수행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나 차별을 여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수행 때문에 괴로워지는 일이 생긴다면 이건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란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행을 하면서, 불법(佛法)을 공부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 한다거나 더 못한다는 이같은 양쪽의 극단적인 생각은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망상(妄想)이고 차별심일 뿐 전혀 수행과는 거리가 멀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닦는다는 작위적(作爲的)인 노력을 통해 없는 것을 얻어 가진 것이므로 언젠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다. 도는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나 법이나 도가 특별한 경지의 어떤 대상이라면 노력을 통해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아니기에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도가 만약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잘 닦는 사람과 잘 못 닦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생겨날 것이다. 도는 누가 더 잘 닦는가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행은 무슨 운동선수나 학교시험 같은 것이 아니다. 더 열심히 한다고 빨리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못한다고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도는 성취하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얻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새롭게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지만, 확인한다는 것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그렇게 있었음을 다만 확인하는 것이다. 마조스님은 “어떻게 도를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와 같이 답변했다.
“자성(自性)은 본래 그대로 완전하다. 다만 선이니 악이니 하는데 막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를 수도인(修道人)이라 할 수 있다.”
마조선사는 또 <마조어록>에서 이렇게 법을 설하고 있다. “도는 닦을 것이 없으니, 다만 물들지만 말라. 무엇이 물듦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조작하여 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물듦이다. 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이 바로 도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인위적(人爲的)인 조작이 없고, 옳고 그름이 없고, 붙잡거나 버리는 일이 없으며, 끊어지거나 항상 함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도는 닦을 것이 없다.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마조스님의 표현에 의한다면 “자성본래구족” 즉, “자성은 본래 그대로 완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배고플 때 밥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자는 이 단순한 매 순간의 평범한 현실이 고스란히 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