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빌 게이츠씨, 당신들 평양 사회사업가 ‘백선행’ 이름 들어보았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인생에서 뜻을 세우는 것을 입지(立志)라 한다. 뜻을 세우고 추진하지 않으면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특히 학문이나 사업, 깨달음은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자신의 결심이 중요하다. 천하의 모든 일은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 그것이 기준이자 목표가 된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마음은 정신에서 분별(分別)이 나타낼 때가 마음이다. 그 마음에서 뜻이 나타난다. 그리고 뜻은 곧 마음이 통하여 가는 곳을 이른다.

옛날 평양에 열여섯 살에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다. 이 소년과부는 1848년 평양의 이름 없는 촌부 백지용의 맏딸로 태어났다. 백지용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 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런 소녀 백씨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홀어머니 손에 자라 열네 살에 안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시집 간지 2년 만에 병약했던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시집에서 쫓겨났다. 친정으로 돌아온 16살 소녀 백씨는 친정엄마와 함께 쌍과부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그녀가 26살 되던 해 친정엄마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너는 똑똑한데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는 말을 남긴 친정엄마가 물려준 것은 현금 1천여냥과 150냥짜리 집 한 채였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이 몰려와 부모 제사를 모시려면 아들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야 한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사촌오빠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오빠가 전 재산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26살에 빈털터리가 된 백과부는 다시 이를 악물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돈 버는데 입지를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환갑 때까지 ‘평양의 백과부’로 불렸다.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20여리 떨어진 시장에 가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와 돼지를 길렀으며, 남들이 먹다버린 복숭아씨를 모아 시장에 내다팔고, 콩나물 장사도 했다.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이런 백과부를 두고 사람들은 ‘악바리 백과부, 지독한 백과부’라 불렀다. 그러나 백과부는 꿋꿋하게 열심히 일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았으며, 남의 궂은 일에는 제일 먼저 달려가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백과부를 좋아했고, 백과부가 하는 일은 모두 도와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과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고, 탐관오리 평양부윤 그를 불러 재산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백과부는 죽으면 죽었지 이유 없는 재산은 못 내놓는다고 버티자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생사람 잡지 말라고 상소를 올리며 동헌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탐관오리 평양부윤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백과부는 땅을 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대여해 소작료를 받아 다시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렸다.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고리대를 이용해서 쉽게 재산을 늘렸지만 백과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은 덕을 베푼 백과부에게도 복이 찾아왔다. 악착같이 벌어온 돈을 10배로 늘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백과부는 일본에서 건물을 지을 때 시멘트로 짖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일본사람이 가지고 있던 대동강 근처에 있는 만달산을 싼값에 구입했다.

만달산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돌산이지만 몽땅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일이 그녀에게 큰 행운이 되었던 것이다. 얼마 후 시멘트가 대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면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가득한 만달산을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되팔았다.

그렇게 부자가 된 백과부는 1908년 환갑을 맞아 대동군 고평면 고향에 커다란 다리 하나를 놓았다. 이 동네는 마을 중앙으로 큰 냇가가 있어 평소에도 물이 많아 잘 건너지 못했는데 이곳에 다리를 놓으니 마을에 큰 경사였다. 마을 사람들이 백과부를 크게 칭송하자 “돈이란 아무리 아까워도 써야 할 곳엔 꼭 써야 하지요”란 말만 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백과부’를 ‘백선행(白善行)’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선행’은 이름도 없던 백과부의 이름이 되었다. 그 뒤에도 ‘백선행’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많은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또 배우지 못한 어머니의 한이면서 자신의 한이었던 학교를 세우고 또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평양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가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 또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하자고 하자 현재 가치로 150억원 상당의 공사비와 운영자금을 제공했다.

이때 지어진 공회당이 지금의 ‘백선행기념관’이 됐다. 1933년 5월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35만원(현재가치 350억원)의 재산은 한푼도 남기지 않았다. 한 한국여성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진 백선행의 장례식에는 1만여 인파가 운집했으며, 수천명이 상복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300개가 넘는 화환과 만장(晩章)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다. 당시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평양 백과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열여섯 앳된 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한 그녀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그녀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은 수천을 헤아렸고 평양시 전체가 그를 애도했다.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 여성최초의 입지전적인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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