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참회’의 두가지 방법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사람은 누구나 죄를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다. 그런데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렇게 지은 죄가 쌓이고 쌓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이생에서도 악도(惡道)에 떨어져 지옥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죽어서도 무간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뻔하다. 또한 설혹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악도에 헤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지은대로 받는 것이 인과(因果)다. 그러므로 그 업보를 달게 받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참회다. 참회(懺悔)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반성하는 것이다. 참은 산스크리트어 크사마(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청하는 것’이며, 회(悔)는 ksama의 의역으로 ‘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리 전에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 지어온 잘못은 물론 현재 생활하고 있는 가운데 지은 모든 잘못과 허물을 뉘우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진리 앞에 맹세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 종교에서는 참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참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내밀한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용서를 청하는 겸허한 태도다.
이는 진리님께 향하는 거짓 없는 마음의 나타냄인 동시에 자비를 베푸는 진리의 마음자리다. 남이 강제로 시킨다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동안의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고 참된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욕이며 갈망이다.
참회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참(事懺)이요, 또 하나는 이참(理懺)이다. 사참이라 하는 것은 성심으로 진리와 법(法)과 스승님 전에 죄과(罪過)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善)을 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참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텅 빈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가는 걸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 사참과 이참을 함께 닦아 밖으로 모든 선업(善業)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해 가는 것이다. 이런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차갑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솥에다가 냉수를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꺼버림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백천겁(百千劫)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 진다.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면 적적성성(寂寂醒醒)한 자성불(自性佛)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게 된다. 이런 사람은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진다. 그럼 우리는 삼계(三界, 欲界 色界 無色界)와 육도(六道, 天道 人道 修羅 畜生 餓鬼 地獄)가 평등일미(平等一味)요, 동정역순(動靜逆順)이 무비삼매(無非三昧)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마침내 천만죄고(千萬罪苦)가 더운 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苦)도 고가 아니요, 죄가 죄도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慧光)이 발하여 이 티끌세상이 다 도량(道場)이며 극락정토가 된다. 이 정도에 이르러야 비로소 티끌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불조(佛祖)의 참회요, 대승(大乘)의 참회로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는 것이다.
참회라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냥 죄를 빌면 진리께서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과의 세계는 지은 죄는 철저히 자신이 받고 치러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참회를 게을리 하면 용서받을 길이 없다.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참회를 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참회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악도를 놓고 선도(善道)에 들어오는 첫 문이다. 사람이 과거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를 행하면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업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워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진다.
죄는 본래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그 마음만 멸(滅)하게 되면 죄는 반드시 없어진다. 업은 본래 무명(無明)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는 것이다.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瞋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죄를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없어질 날이 없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자신은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던가를 기록한 책이 있다.
자전적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이 책에 보면 반성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거듭거듭 실토하는 대목이 나온다. 세상에서 그렇게 현명한 사람도 그처럼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살아간다.
1818년 57세 다산은 18년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4년 뒤인 1822년 회갑을 맞았다. 그리고 이 책에 “무릇 평생 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아 가슴속에 회한이 가득하다. 금년(1822년) 이르러 내가 태어난 임오년(1762년)을 다시 맞은 해이므로 이른바 회갑을 맞은 것이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한가히 세월 보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는 데 힘쓰면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지금부터 그렇게 살아간다면 큰 잘못이 없으리라.”
다산 같은 성자도 반성하고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참회를 거듭했다. 천진하여 사(邪) 없는 마음이 천심(天心)이다. 그 천심으로 하는 심판이 곧 하늘의 심판이다. 우리 자신의 선악을 천심으로 판정해 보는 것이다. 하늘은 짓지 않은 복을 내리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짓지 않은 죄는 받지 않는 법이다.
죄는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지은 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데 죄가 안 온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죄업이 말끔히 씻어질 때까지 참회하고 개과천선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도가 차면 돌아올 것은 다 돌아온다. 방심하지 말고 꾸준히 참회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