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아들 사랑 담은 ‘하피첩’과 최순실-정유라 모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한때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1801년 40세에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간다. 경기도 양수리 마재에 남았던 아내 홍씨는 남편 귀양 10년째 되는 해 자기가 시집올 때 입었던 50년 된 치마를 남편에게 보낸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 홀로 떨어져 고생하는 남편을 애틋해하는 마음을 신혼시절 색 바랜 다홍치마에 담은 것이다.

그 치마는 아내의 일편단심 사랑의 징표였다. 다산은 그 치마에 두 아들 학연(學淵)과 학유(學遊)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었다. 그리고 부인의 치마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하피첩(霞?帖)’이라 이름을 지었다. 제작연대는 경오년(庚午年) 즉 1810년(순조 10) 7월과 9월로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하피첩은 원래 네 첩이었으나 현재 세 첩만 남았다. ‘하피첩’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을 적에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그것은 시집올 때의 훈염(??, 예복)으로 붉은빛은 흐려지고 노란빛은 옅어져 글씨 쓰는 바탕으로 알맞았다. 이것을 잘라서 조그만 첩(帖)을 만들고, 손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준 것이다. 훗날 이 글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리는 감정이 뭉클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홍군(紅裙)이라고 한 것이다. 가경(嘉慶) 경오년(1810, 순조 10) 7월에 다산(茶山)의 동암(東菴)에서 쓰다.”

‘하피첩’이라고 한 것은 하(霞)자가 석양의 붉은 노을, 피(?)는 치마(裙子), 첩(帖)은 소책자란 뜻이다. 하피첩에는 선비가 가져야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등 자손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은 삶의 가치관이 담겨있다. 그 내용 중 백미가 두 아들에게 보낸 내용이다.

병든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 왔네(病妻寄?裙)

천리 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千里託心素)

흘러간 세월에 붉은빛 다 바래서(歲久紅己褪)

만년에 서글픔을 가눌 수 없구나(?然念衰暮)

마름질로 작은 서첩을 만들어(裁成小書帖)

아들을 일깨우는 글을 적으니(聊寫戒子句)

부디 어버이 마음 잘 헤아려(庶幾念二親)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려무나(終身鐫肺腑)

다산은 여생을 보냈던 ‘여유당’(與猶堂)에서 혼인 60주년을 맞는 그 날 아침,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산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회혼일(回婚日)을 3일 앞두고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시 한편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언이자 일생을 정리한 마지막 글이다.

육십년 풍상의 바퀴 순식간에 흘러갔는데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시절 같구려

생리사별은 인간의 늙음을 재촉하건만

슬픔 짧고 기쁨 길어 임금님 은혜에 감사하네

그 옛날의 하피에 먹 흔적이 아직 남았는데

쪼개졌다 합한 것은 우리 모습이니

표주박 한 쌍을 자식에게 물려주네.

이 내용에는 옛날의 하피첩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수 십 년 전 먹 흔적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유배생활로 쪼개졌다 합한 다산 부부의 모습 같은 것을 표주박 한 쌍이라는 상형문자로 그리고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한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시가 아닌가?

하피첩은 6·25전쟁 때 분실되었다가 2004년 수원의 한 건물주가 폐지 줍는 할머니의 물건이 비범해 보여 자신의 폐지와 교환해서 세상에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그걸 2006년 건물주는 KBS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들고 나와 진품 하피첩임을 감정 받고 당시 1억원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 후 하피첩은 또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부산저축은행 전 대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2011년 그가 파산하면서 예금보험공사가 하피첩을 압류했고, 2015년 9월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국립민속박물관이 7억5000만 원에 낙찰 받아 소장 중이다. 그걸 2015년 10월 국립민속박물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18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생이별이 되어 다산 부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어찌 가슴이 찡하지 않겠는가? 다산의 일생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그가 살아온 나날은 질곡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하피첩은 지금도 다산학(茶山學)이라는 학문으로 연구하고 보물로 남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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