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붉은악마’에서 ‘2016 촛불집회’ 싹트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2002년 월드컵 때의 일이다. 8강 때 우리 식구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갔다. 얼굴에는 딸아이가 태극기를 그려 넣어 주었다. 목에는 붉은악마가 새겨진 수건을 두르고 수많은 군중 속에서 목청껏 “대~한 민국”을 연호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그때의 열기를 지난 26일 광화문광장의 시위에서 TV현장중계로 느낄 수 있었다. 다리만 불편하지 않았어도 아마 달려갔을 것이다. 사상최대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2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신 “박근혜 하야”를 외친 것이 달랐다.
배려하며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하는 모습에선 더할 나위없는 우리 국민들의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역사적인 시위를 보고 전 세계가 놀란 대한민국 국민들의 배려의 위력은 무엇일까?
배려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도와주거나 마음을 써서 보살펴 주는 것을 말한다. 배려야 말로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지감지’(易地感之), ‘역지행지’(易地行之)>의 자세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지는 배려가 나온다.
‘배’(配)는 ‘술 유’(酉)와 ‘몸 기’(己)가 합쳐진 모양으로 술 단지를 늘어놓는 모양에서 ‘늘어놓다’라는 뜻이다. 술 단지(酉)를 마주하고 앉은 사람(己)이라는 뜻으로 짝꿍이란 의미다. 그리고 ‘려’(慮)는 빙빙 돈다는 뜻의 로(盧)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말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근심하다’ ‘걱정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11월26일 광화문 광장과 전국의 각 도시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는 역대 최대인 190만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모였다.
그런데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다. 바로 이 배려의 위력이 발동된 결과다. 참가자들은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일부 흥분한 시민들이 경찰에 시비를 걸거나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면 다른 참가자들은 ‘평화집회’를 외치며 자제를 시켰다.
가족이나 연인, 중고생 등 일반시민이 대거 집회에 참가했다. 더욱이 아름다운 장면은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바닥에 보이는 쓰레기를 주워 한편에 마련한 쓰레기통에 모으는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휴대전화 손전등으로 비추며 긁어내는 사람도 많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된 문화제에서는 박 대통령을 풍자하는 발언과 순서가 두드러졌다. 본 집회 시작 직전 참석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몸을 푸는 순서에서 시범을 보이는 사람이 “문화체육관광부가 3억5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보급한 차은택씨의 ‘늘품체조’ 대신 3500원짜리 ‘하품체조’를 가르쳐주겠다”며 웃음을 선사했다.
민중총궐기를 외친 한 발언자는 “투쟁 대신 하야로 인사하겠다, 하야!”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또 문화예술계 인사와 학생들은 퍼포먼스의 형태로 집회에 동참했다. 문화제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가수 이승환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들지 못해 창피하다. 요즘 정신적 폭행을 당한 느낌”이라며 자신의 대표곡 ‘덩크슛’ 중 일부 노랫말을 “하야하라 박근혜”로 바꿔 시민들과 함께 열창했다.
그리고 이날 민중총궐기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쌀값 폭락 저지, 사드 배치 반대, 농민 백남기씨 사망 진상규명 등 온갖 이슈가 폭발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광화문광장 남측 농성장 분향소에서 줄을 지어 분향하면서 ‘세월호희생자’를 추모했다. 농민들은 ‘쌀값대폭락 박근혜 퇴진’이라 외치며 정부의 밥쌀 수입정책과 추곡수매가 인하 등을 비판했다.
특히 광화문광장을 찾은 외국인들은 “이렇게 평화로운 대규모 시위는 난생 처음”이라고 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평화롭고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 문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미국인은 “다양한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사물놀이와 같은 자발적인 소규모 행사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게 인상적이었다고 감탄했다.
외신들도 집중보도를 통해 매주 연이어 펼쳐지는 ‘평화시위’에 주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유럽·중동 등 세계 매체들은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는 자국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사안”이라고 전했다. 또 “이번 촛불집회가 전 세계에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새롭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인은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처럼 추운 날씨에도 한데 뭉쳐 집회를 여는 게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국적의 한 사업가는 “프랑스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자유로운 대표적인 나라지만 때때로 집회가 폭력적으로 진행되는데 한국의 집회는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사람들 표정이 밝은 것이 인상적”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첫눈이 내린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인파가 서울 중심가를 채웠다”며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로 보인다”고 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집회 참가자 150만명이 모였지만 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며 “한국 국민이 축제와 같은 평화시위의 새 장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부와 권력을 움켜쥐었다고 그 권력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작고 약해보이는 촛불이라도 훅 불면 꺼지는 촛불이 아니다. 중요한 순간에 크게 타오르는 촛불이 횃불이 되고 활화산이 된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작고 사소한 배려지만 이렇게 세계의 찬사를 받으며 막강한 권력과 정권이라도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이 배려의 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