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과 태극기의 공존 방법, 정녕 없는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이웃 중국의 지역감정도 보통이 아니다. 특히 산동인(山東人)들의 지역감정은 아주 심각하다. 예로부터 중국 사람들은 ‘십리를 가면 삶의 방식이 다르고, 백리를 가면 풍속이 다르며, 천리를 가면 인간의 감정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왕왕 자신과 고향이 다르면 다르다는 이유하나로 공연히 타 지역 사람들을 싫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산동사람들은 하남성(河南省) 사람과 동북3성(東北三省)사람들을 가장 싫어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산동인은 적어도 그들과 혼인도 안한다고 한다. 동북사람들도 저희들끼리만 결혼하고 싶어한다.
산동사람들은 하남사람들을 신의를 안 지키는 사람이라고 매도하고, 동북사람들을 잔꾀만 부리고 만사에 성실하지 않다고 흉을 본다. 동북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을 표리부동하고 엉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일어나는 종족 간, 지역 간의 불화나 지역감정을 짧은 식견으로 다 살펴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례를 보고 지금 중국의 종족간이나 지역갈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는 있다. 결국 이런 지역갈등이나 종족간의 갈등을 가지고는 어느 나라나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율곡 이이(1537∼1584) 선생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 있다. 양시(兩是)는 둘 다 옳다는 뜻이고, 양비(兩非)는 둘 다 옳지 않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로 양시론은 맞서서 내세우는 두 말이 모두 옳다는 주장이나 이론이고, 양비론은 맞서서 내세우는 두 말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극단을 떠나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행법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유(有)나 공(空)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또는 고락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중도라고 하며, 이를 실천하는 방법이 팔정도(八正道)다.
유교의 중용사상(中庸思想)은 난해하여 이해하긴 어렵다. 그러나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하였다. 이것은 곧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원불교에서도 ‘불편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圓滿行)’을 주요 교리로 삼는데, 이 원만행이 바로 중도다. 즉, 중도는 ‘정의롭게 하는 것, 또는 가장 타당한 방향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율곡이 당파 싸움을 보면서 당쟁은 나라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며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가 있다. 지금 두 파의 싸움은 나라와 백성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니 둘 다 그른 경우이다. 마땅히 화해해야 옳은 일이요, 한 편만을 고집하면 두 편의 사이를 더욱 벌리는 결과밖에 안 된다”고 설파하였다.
이것이 양시양비의 논리다.
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모든 곳에서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광화문에서는 촛불민심이 거리를 뒤덮고, 대한문에서는 태극기의 물결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행동과 논리는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과실로 인해 지엄한 탄핵을 받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뿐이다.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어서 이 기막힌 싸움을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