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순 나이에 백내장 수술 앞두고 떠오른 단어들···無位眞人·不欺者心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왼쪽 눈에 백내장(白內障) 수술을 할 예정이다. 나는 오래 전 어떠한 경우라도 내 몸을 위하여 수술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이번 백내장 수술을 안 하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수술에 응하기로 마음을 냈다.
불가(佛家)에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는 말이 있다.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달 수 없을 만큼의 경지에 오른 참된 도인을 말한다. 또 모든 미혹(迷惑)함과 깨달음을 초월한 인간의 궁극적인 진실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다음은 당(唐)나라의 선승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가르침에 나오는 화두다.
“붉은 몸뚱이에 한 사람의 무위진인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얼굴을 통해서 출입한다.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잘 살펴보아라.”
그때에 한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무위진인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이 법상에서 내려와서 그의 멱살을 꽉 움켜잡고 “말해봐라. 어떤 것이 무위진인인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은 밀쳐버리며 말했다. “무위진인이 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인가?” 그리고는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 버렸다.
당나라 때 대시인 백낙천(白樂天, 772~846)이 도림선사(道林禪師, 741~824)를 찾아가서 “불교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선사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백낙천이 웃으며 “그런 것은 어린애도 다 아는 게 아닙니까?”하고 반문했다. 선사는 “비록 세살 먹은 어린애도 다 알지만 여든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지요” 라고 답했다.
또 ‘불기자심’(不欺者心)이라는 말이 있다. 성철(性徹, 1912∼1993) 대종사께서 해인사 백련암에서 삼천 배를 수행한 불자들에게 좌우명으로 직접 써준 글이라고 한다. 이 뜻은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자기를 속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자기가 부처인줄 모르니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좀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죄의식 없이 최대의 죄악인 남을 속이고 자신까지 속이는 행위를 계속 반복해 왔다. 죄 짓는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자기 자신이 ‘무위진인’임을 모르고 살고 있다.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자기가 부처인 줄 모르는 것이 어찌 죄가 아닐까?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자기가 ‘무위진인’인 것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고, 둘째는 자신이 깨달으면 ‘무위진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들도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며, 보이는 만물이 모두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꼭 깨달아야만 부처이고 깨닫지 못한 것은 부처가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견해라는 얘기다.
사람이 닦아서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 그 자체가 부처인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불기자심’의 참 뜻이다.
‘불기자심’의 또 다른 해석은 자기에게 정직하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정직하라는 말도 결국 “자기를 바로 보라”는 의미다. 자기를 바로 보면 자기가 부처인 것을 알게 됩니다. 본래로 이미 다 갖추고 있는 무한의 생명과 모든 공덕과 복덕(福德)을 완벽하게 구비한 스스로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부처이면 다른 모든 이들도 부처다. 내가 부처이고 남들도 부처로 보일 때, 현실 그대로가 바로 극락이요 천당이다. 누구든 자신의 것 외에 밖으로 구하지 않고, 밖의 것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완전무결한 부처님이요, 무위진인이다.
부처님이 열반하기 전에 아난존자에게 말씀하신 내용 중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이 있다.
“너희들은 마땅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야지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아야 한다. 자신에게 귀의(歸依)하고 법에 귀의하지 다른데 귀의하지 말라.”
불가의 수행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하는 자력수행이다. 물론 신앙적인 방편에서 본다면 불보살에게 귀의하고 의지하는 의타적(依他的)인 요소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성취는 자기의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이를 ‘자타력 병진’(自他力 竝進)이라고 한다.
유무(有無)를 초월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는 나이가 되어 어디 조금 아프다고 쪼르륵 병원으로 달려가 째고 꿰매고 하는 그런 덧없는 짓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