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아우의 궁궐 무단 출입 막은 노비출신 궁지기 ‘박자청’
1393년(태조 2)에 중랑장 박자청은 당번이 되어 궁궐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왕의 아우 의안대군 이화(李和)가 들어가려고 했다. 박자청은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굳게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안대군 이화는 화가 나서 그를 발길로 차 박자청의 안면에 상처를 입혔다. 그래도 박자청은 의안대군을 끝까지 궁궐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조가 이를 알고 이화를 불러서 하교(下敎)하였다. “옛날에 주아부의 세류영에서는 다만 장군의 명령만 듣고 천자의 조서(詔書)는 듣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제 박자청이 대군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은 진실로 옳은 일이고, 의안대군은 잘한 일이 못된다.” 그리고 바로 박자청을 호군(무관 정4품)에 임명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그후, 내부의 당직을 명하여 유막(?幕) 밖에서 숙직 호위하게 했다. 박자청은 초저녁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순행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도 잠자리에 들지 않으므로 드디어 태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태조와 태종은 우직한 그를 무척이나 신뢰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건축물을 조성하는데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는 태조 3년(1394년) 공역(公役)에 첫발을 내디뎌 영선(營繕)의 감역관 재질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태종 5년 제조(提調)로서 창덕궁을 완공하고 이듬해 선공감(繕工監)이 되어 이때부터 나라의 영선관계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태종 7년 성균관 문묘(文廟)를 완공했고, 이듬해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과 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의 산역(山役)을 주관했다. 그 공으로 그해 10월 공조판서에 임명되니 이른바 선공인(繕工人)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태종 12년에는 경회루의 대역사를 태종의 명을 받아 불과 8개월만에 해냈다.
우리는 정도전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한다. 하지만 박자청은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후인들이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박자청은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다만 부지런하고 곧았다. 그러나 간관(諫官)들의 잦은 탄핵으로 파직과 귀양을 면치 못하다 결국 마지막 벼슬인 ‘판우군도총제부사’를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약 청와대에 박자청 같은 경호원이 단 한명만 있었어도 청와대에 보안 손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 유례없는 대통령의 탄핵은 없었을 것이고, 또 최순실 같은 간악한 여인의 국정농단을 없었을 것이며, 대통령의 탄핵 같은 불행한 사태는 없을 것이다. 물론 대다수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은 짧게는 수년간, 길게는 수십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 대통령 경호에 최선을 다해온 것으로 안다. 그래서 더 아쉬운 것이다.
우리에게는 박자청 같은 올바른 청와대 문지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시는 보안 손님은 없을 것이고, 최순실 같은 국정농단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