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정치권에 한 말씀 하신다면 “제발 ‘취로적낭’에서 벗어나시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취로적낭(就?摘囊)이라는 말이 있다. ‘이룰 취(就), 노 로(?), 딸 적(摘), 주머니 낭(囊)’으로 꽤 어려운 한자를 쓰고 있다. 뒤집히는 배에서 뱃전으로 달려가 남의 주머니를 낚아챈다는 말로, 위험을 모르고 이익에만 매달린다는 의미다. 이 글은 다산이 초의선사(草衣禪師)에게 준 <증언첩>(贈言帖)에 나오는 말이다.
정민 교수의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취로적낭’에 관한 글이 나온다.
[겨울철 장사치의 배가 강진 월고만(月姑灣)을 건너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회오리바람에 배가 그만 뒤집혔다. 뱃전에 서있던 사람이 물에 빠지자 뱃고물에 앉아있던 자가 잽싸게 달려가더니 물에 빠진 사람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 속에 돈이 두 꿰미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돈주머니를 챙겼을 때 그 자신도 이미 물에 휩쓸리고 있었다. 결국 둘 다 빠져 죽었다.
이 얘기를 들은 다산이 말했다. “아! 천하에 뱃전으로 달려가 주머니를 낚아채지(就?摘囊) 않을 사람이 드물다. 이 세상은 물새는 배다. 약육강식이라지만 강한 놈과 약한 놈이 함께 죽고, 백성의 재물을 부호가 강탈해도 백성과 부호는 똑같이 죽고 만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삼포(三浦)에 살 때 일이다. 어떤 사람이 허리에 돈 열 꿰미를 찬 채 얼음이 녹고 있는 강을 건너다가 반을 채 못 가서 물에 빠졌다. 상반신이 얼음 위에 걸려 버둥대자 강가에 있던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여보게! 허리에 찬 돈을 어서 풀어버리게. 그래야 살 수가 있네.”
그는 그 와중에도 고개를 세게 저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두 손으로 돈꿰미를 꼭 움켜쥔 채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나온다. 남이 찬 멋진 은장도를 옆 사람이 부러워하자 은장도 주인이 장난으로 큰 고깃덩어리를 주며 말했다. “이 고기를 안 씹고 통째로 삼키면 은장도를 주지.” 곁에 있던 사람이 서슴없이 고기를 꿀꺽 삼켰다. 고깃덩어리가 목구멍에 딱 걸려 두 눈이 튀어나왔다. 그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버둥댔다.
고기를 삼키라 한 사람이 놀라서 말했다. “그냥 은장도를 줄 테니 어서 그 고기를 토하게.” 그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겨우 고깃덩이가 내려갔다. 그가 은장도를 취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토하면 자네가 딴소리할까 봐 참았지.” 역시 <이목구심서>에 실려 있다. 침몰하는 배에서 남의 돈을 가로채고, 얼음에 걸려서도 돈꿰미를 놓지 못한다. 사람이 까짓 은장도에 목숨을 걸고도 아무 뉘우침이 없다.]
<아시아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두 인간의 탐욕(貪慾)에서 나온 일이다. 이 탐심(貪心)과 치심(癡心)과 진심(嗔心)을 일러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한다. 이 삼독심만 여의면 우리는 최고의 인생, 바로 불보살의 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면 이 삼독심을 여의려면 어찌하면 좋을까?
‘삼독심을 다스리는 법’
첫째, 탐심이다.
탐심은 탐욕, 집착, 욕심, 헐떡거림, 달라붙음을 말한다. △탐심의 특성은 대상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탐심은 마치 잘 달구어진 석쇠에 눌러 붙은 고기처럼,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이다. 탐심은 즐길 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계속 커진다.
△욕계(欲界)의 중생은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수행자는 탐심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그것이 적절한 것인가, 필요 이상인가를 알고 적절하게 취한다. 그러면 탐심을 제어할 수가 있다.
△탐심을 줄이는 방법은 관용과 보시를 실천하는 것이다. 보시 자체가 탐심이 없고 관용과 자애가 있어야 가능하다. 관용과 보시가 습관이 되면 그만큼 탐심은 줄어든다.
둘째, 진심이다.
성냄, 진에(瞋?), 화냄, 분노, 혐오, 질투, 후회, 인색함, 회피함, 없애려 함 등을 말한다.
△성냄의 뿌리는 혐오이며, 원하는 대상을 얻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냄의 바탕에는 탐심이 있다.
△인과를 모르기 때문에 화가 난다. 이미 화를 냈다면 그것을 알아차려서 분노의 감정을 소멸하고, 그 자리를 관용과 자애로 채워야 한다.
△수행자가 성냄, 질투, 인색, 후회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그 자리에 자애와 연민이 들어간다. 성냄을 극복한 사람에게서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의 향기가 느껴진다.
셋째, 치심이다.
치심은 어리석음, 무명, 무지, 미혹, 둔함, 망상, 현혹, 맹목성, 들뜸, 의심 등을 말한다.
△어리석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에게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리석음은 모든 불선업(不善業)의 뿌리가 된다.
△무명(無明)은 사성제(四聖蹄)를 모르는 것이고, 무지는 관념과 실재를 모르는 것이다. 수행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그 다음 실재인 오온(五蘊)에서 무상(無常), 고(孤), 무아(無我), 연기(緣起)를 통찰하고, 마지막 사성제를 알게 한다.
△무명의 계층은 다양해서 층층이 쌓여있다. 수행을 해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업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오온의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알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알 때, 자신이 터득한 만큼의 무명이 벗겨진다.
불보살의 경지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한 때에 악을 범한 사람이라도 삼독심을 버리면 악한 기운이 풀어져서 그 앞길이 광명하게 열린다. 그러나 한때 선을 행한 선인이라도 이 삼독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 기운에 악한 기운이 싸고 돌아서 그 앞길이 암담하게 막히는 것이다.
‘취로적낭’이란 욕심 많고, 화를 잘 내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바보같은 사람들의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