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양반들께 꼭 드리고 싶은 이 말씀 ‘소욕지족’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말이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함이 많기 때문에 번뇌도 많기 때문이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함이 적어 근심 걱정도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은 남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첨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서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며, 하는 일에 여유가 있고 부족함이 없다. 이것을 가리켜 소욕(少欲)이라 한다. 모든 고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넉넉함을 알면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화롭다.

그런 사람은 비록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어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면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함을 알기는 어렵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한 듯해도 사실은 부유한 사람이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행복이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안에 있다. 그리고 사랑은 따뜻한 나눔이고 보살핌이고 관심이다. 소유도 그런 것이다. 갖고 싶은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소유하기까지 안달하고 그러다 막상 손 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소유하려 들면 텅빈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지기 때문에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그런즉 가난한들 어떠하며 무슨 손해가 있을까? 또한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데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될까?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얻는 것보다 덜 써야 한다. 절약하지 않으면 가득 차 있어도 반드시 고갈되고, 절약하면 텅 비어 있어도 언젠가는 차게 된다.

소욕지족!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더 있을지도 모른다. 크고 많은 것만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인생무상이라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돈과 명예와 아름다운 이성과 맛있는 음식과 훌륭한 집은 어쩌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쓸모가 없다. 그러니까 욕심내는 것은 허망한 짓일 수 있다. 다시 말해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무상한 부귀영화를 좇다 일생을 허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사람은 언젠간 모두 죽는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살아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렸거나 그런 것들을 좇으며 일생을 허비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듯하다. 집착을 버리라, 마음을 비우라, 욕망을 놓으라고들 말한다. 왜 그럴까?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에서 삶의 행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과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 그걸 방하착(放下着)이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집착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집착을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방하착’ 하라, 집착을 놓아라, 아상(我相)을 놓아라, 욕심을 버려라,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라 이런 것이야 누구든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도대체 누구도 다 아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첫째, 집착을 여의는 방법이다.

아주 기본적으로 집착을 놓아버리려면 먼저 내가 집착하고 있던 바로 그 집착의 대상이 ‘그다지 집착할 만 한 것이 아닌 것’이 되면 가능해진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집착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집착할 만 한 것’, ‘집착할 만큼 좋은 것’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며, 돈도 명예도 권력, 생각, 종교, 사상, 재산 등 이 모든 것들이 다 변한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언젠가는 분명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둘째,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높은 명예나 지위에 집착하고 있다면 내가 그 지위에 오르는 순간, 나와 그 지위를 동일시하곤 한다. 그러나 거기에 나라는 어떤 실체적인 것은 없다. 나라는 것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은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고정된 것이어야 하고, 실체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로 인해 우리에게 실질적인 어떤 것을 안겨주어야 한다. 그런데 고정된 실체가 없는 대상이라면 거기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집착이란 그 어떤 실체도 없이 다만 인연 따라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우리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이 삼법인(三法印)의 진리를 깨쳐야 한다. 그런 사람은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을 허공같이 비워야 소욕지족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인생은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뜬 구름같고 안개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귀영화 잡아 보았자 아주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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