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오늘은 중복 겸 대서, 무더운 여름날 당신이 마음을 둘 곳은?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일귀하처’(一歸何處). 불교 선종(禪宗)의 1700 공안(公案) 가운데의 하나로 “모든 사물은 반드시 한군데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하나는 어디로 가는고?”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걸 알면 성리(性理)를 깨달은 불보살이요 모르면 중생(衆生)이다. “생이여! 어디로부터 왔는가?” “죽음이여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수수께끼요, 영원한 화두(話頭)다. 이를 알면 삶과 죽음이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세상(造化世上)이다. 우리가 진정 죽음을 모른다면 진정한 삶도 모르는 것 아닐까?

이 우주는 만물로 가득 차 있다.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만물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은 길흉화복(吉凶禍福), 인간은 생주이멸(生住異滅)로 돌고 도는 것이다. ‘만법’이란 그 만물 각각을 작용하는 법칙을 말한다. 그러니까 만법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다시 말하면 만물이란 것이 하나에서 나왔듯이 만법이란 것도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은 사람을 만물을 차별 없이 하나로 본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기는 여럿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옳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도 생주이멸로 돌고 도는 것에 불과하다.

불이문(不二門)이 무엇일까? 하나의 문을 말한다. 하나님을 말하는 것도 일(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결국 우주만유의 본원(本源), 제불제성의 심인(心印), 일체 중생의 본성(本性)인 일원(一圓)의 진리, 즉 법신불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이다.

이 진리의 깨달음도 마음에서 나오고 번뇌, 망상도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은 정신에서 나오고 정신은 성품에 바탕해 있다. 마음이란 천만 가지 여러 갈래로 나오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인 그 자리에서 나온 줄 알면 하나인 그 자리를 알아 하나인 그 자리로 회귀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가 아닌 것은 다 분별(分別)하는 것이요, 차별(差別)하는 것이다. 그 분별과 차별을 뛰어 넘는 마음이 바로 성자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다.

본래 이 세상은 처음 생겨나서는 아무런 시비도 없고, 선과 악이라는 개념조차 없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낙원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고, 부딪치고 사는 일에서부터 좋고, 나쁘고, 내것, 네것 하는 한 생각을 일으킨 순간부터 낙원은 한순간에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인간의 고통이 시작됐다.

그러면 이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인생은 고해(苦海)라 했다. 그 분별에서 시작된 인간의 고통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 한다. 생로병사 4가지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한 것이 팔고(八苦)다.

이 모든 고통은 내가 극본을 쓰고 연출도 하고, 내가 주인공과 조연을 맡아서 진행하며 울고 웃는다. 고통이 싫다면 스스로 만들어 펼치는 연극 한편 잘 보다가 막을 내리면 아무 미련 없이 다음 장소로 이동해 가면 고통은 소멸되는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시끄러운 것, 고요를 맛보고 싶으면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려는 그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리고 내가 먼저 조용해지는 방법을 알아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되면 세상은 본디 조용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길이 보일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생사를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깨친 사람은 생사에 해탈을 얻고, 마음을 자유로 하며, 죄와 복을 임의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는 데에도 세가지 단계가 있다. 하나는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둘은 본래에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체(體)받아 지키는 것이요, 셋은 본래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베풀어 활용하는 것이다.

이 생사 거래(去來)에도 세 가지 근기(根機)가 있다.

첫째는 애착(愛着) 탐착(貪着) 원착(怨着)에 끌려서 거래하는 근기다. 이 근기는 가고 오는 길에 정견(正見)을 하지 못하고 항상 전도(顚倒)되어 닥치는 대로 수생(受生)한다. 그리고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며 또는 원한이나 증오에 끌려 악도(惡道)에 타락한다.

둘째는 굳은 원력(願力)을 세우고 거래하는 근기다. 이런 사람은 정법회상(正法會上)에 철저한 신념과 발원(發願)을 가지고 평소에 수행을 하며 최후의 일념을 청정(淸淨)히 하면 오나가나 부처님 회상에 찾아드는 것이 마치 자석에 쇠가 따르는 것 같이 된다.

셋째는 마음의 능력으로써 생사를 자유로 하는 근기다. 이는 철저한 수행의 결과 정신수양(情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 작업취사(作業取捨)의 삼학(三學)을 닦아 삼대력(三大力)을 원만히 갖춘 불보살 성현들이 육도거래(六道去來)를 임의로 하는 것을 말한다.

욕심을 떠나 마음을 발(發)하는 것이 서원(誓願)이다. 밉고 사랑스러운 데만 끌리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은 청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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