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2025년은 뱀띠 해다. 뱀은 구약성서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사탄의 변용(變容)으로 나타나고, 법화경(法華經)에서는 유혹과 애욕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꿈에 뱀이 나타난 날은 왠지 기분이 꺼림칙하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뱀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렇지만 뱀의 세계에는 소름끼치는 독사(毒蛇)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료계의 로고가 된 아스클레피오스와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감겨있다. 독사가 아니다. 신비한 치유의 힘을 지닌 영물(靈物)이다.
예수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가르쳤다. 비둘기의 순결은 고결한 이상을, 뱀의 지혜는 냉철한 분별력을 뜻하는 것이리라. 비둘기는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지만, 우리 삶의 기반은 이 낮은 땅에 있다. 하이데거가 지적한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다. 온몸을 땅바닥에 깔고 사는 뱀만큼 땅의 현실에 투철한 ‘세계 내 존재’도 달리 없겠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 땅을 기어다니는 뱀… 하늘과 땅, 이상과 현실, 영혼과 육체, 마음과 몸의 조화다. 유심론(唯心論)과 유물론(唯物論)을 모두 넘어선 영육합일(靈肉合一)의 세계다.
“해동육룡(海東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용비어천가’의 첫 구절이다. 거대한 뱀의 몸으로 하늘을 나는 용은 옛적부터 인류가 상상 속에 품어온 초월적 존재였다. 그런데 아즈텍 신화의 퀘찰코아틀루스와 날아다니는 도마뱀 프테로사우로스의 화석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날개 달린 뱀, 하늘의 순결과 땅의 지혜를 아우르는 익룡(翼龍)이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지구상에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신(神) 없는 세계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니체는 뱀과 독수리를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의 동반자로 삼았다. 비둘기를 독수리로 바꿨지만, 지혜의 뱀은 예수의 비유를 그대로 따랐다. 무신론자에게도 초인(超人)에게도, 뱀의 지혜는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인가 보다.
예수는 이 땅의 현실을 외면한 몽상가가 아니었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을 축복하고, 죽은 이를 위해 눈물 흘렸다. 씨 뿌리는 농부, 멧돌을 돌리는 아낙네, 집을 나간 말썽꾸러기 아들, 일터를 찾아 헤매는 실업자들… 어느 것 하나 이 땅의 삶 아닌 것이 없다. 모두 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숨 쉬는 ‘세계 내 존재’의 삶이다.
예수는 이 땅의 현실 구석 구석을 헤집으면서 비둘기처럼 순결한 하늘나라의 메시지를 기적처럼 찾아냈다. 그의 하나님 나라는 사후(死後)의 영적 세계가 아니었고, 신비한 환상이나 정교한 교리체계(敎理體系) 속의 천국도 아니었다. 이 땅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 안에 있는 하늘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
하늘의 메시지를 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땅에서 극심한 박해와 위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양이 이리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오늘에도 진실과 정의를 지키려는 이들에게는 힘겨운 고난과 박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늘의 이상에 도취된 나머지 냉혹하고 암담한 이 땅의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사회의 공기가 얼마나 싸늘한가? 오늘 이 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시류(時流)에 휩쓸리거나, 사악한 독사의 무리와 타협하라는 말이 아니다. 엄혹한 시대상황 속에서 순결하고 슬기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매우 힘들고 고달픈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자”는 상승(上昇)의 외침이 아니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내려)왔다”는 하강(下降)의 메시지였다(마태복음 4:17).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 우리의 일상적 삶의 자리 안에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는 선포였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마태복음 6:10)
뱀은 허물을 벗고 새 몸을 입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딱딱하게 굳어진 옛 껍질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일 터이다. 신앙이 제도화(制度化), 의식화(儀式化), 인습화(因襲化)되어 딱딱한 도그마의 각질 속에 파묻히게 되면 마치 굳어진 뱀 껍질처럼 생명의 속살을 짓눌러 질식하게 만든다. 형식이 본질을 죽이는 근본주의, 교리주의, 문자주의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뱀의 해인 올해가 독사처럼 요사스러운 세력이 힘을 얻는 불길한 해가 아니라, 허물 벗은 새 몸으로 엄혹한 현실의 가시밭길을 헤쳐나가는 지혜로운 뱀의 해, 비둘기의 순결을 안고 우리 사회의 깊은 상처를 보듬어 낫게 하는 치유의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