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18] 4·19 직후 민주당 ‘파벌난맥’ 5·16으로 종말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4·19는 이승만 정권 퇴진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정치지배세력 내부에 이미 자리 잡은 계파화 경향과 정치적 인간들의 이기적 ‘욕망사슬’을 끊어버리진 못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과제를 남긴다. 자유당 내 파벌이 끝내 민주당으로 변신하게 될 기본소지와 그 기회구조의 틀까진 부셔버리지 못한다.
민주당은 본래 이승만 정권에 대한 투쟁이란 공동목표를 지닌 이질적 보수 정치계파들 사이의 느슨한 결합으로 이루어진 정치집단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투쟁이 목표로 부각될 경우, 계파 간 갈등은 어느 정도 이완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라지자마자 시작된 권력의 행진은 노골적이었고 투쟁양상 역시 한 마리 죽은 토끼를 타깃으로 덤벼드는 두 마리 굶주린 사자의 모습과 같았다. 민주당의 정치적 배경과 집단 내 파쟁을 살펴보자.
4·19 폭발 6년 전(1954년), 자유당은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한다. 자유당의 이같은 행태에 불만을 품고 당내 소장파 의원 14명이 탈당하자 당의 붕괴는 예고되고 있었다. 현석호·이태용·김영삼·민관식·성원경·황남팔·도진희 등이 이들이다. 민국당은 이들과 무소속의원의 힘을 빌려 야당 연합전선구축을 위한 ‘호헌동지회’ 결성에 나선다. 이 호헌동지회가 바로 민주당의 모체가 된다.
신당 운동을 위한 원내외 야당 연합세력은 조봉암 등 혁신세력 포섭을 둘러싸고 이를 반대하는 ‘자유민주파’와 찬성하는 ‘민주대동파’로 갈라진다. 자유민주파는 민국당 내 보수파였던 신익희·조병옥·김준연·곽상훈 등과 조민당계의 현석호, 그리고 흥사단계의 장면과 정일형 등이 합작하여 보수야당 계파만으로 우파의 단결을 주장한다. 이에 반해 김성수·서상일·신도성·장택상 등 민주대동파는 조봉암을 포함하는 거대야당을 구성하자며 ‘범야(汎野)’의 대동단결을 주장한다. 여러 차례 진통을 거친 신당 발기위원회는 민주대동파와 유대를 포기하고 자유민주파만이 독자적으로 신당 창당을 추진한다.
때마침 김성수가 사망하자 대세는 자유민주파 쪽으로 기울고 민국당과 흥사단계, 조민당계와 원내 자유당계가 합세하여 민주당을 발족시킨다. 발족 당시 주요 인사로는 ‘신익희·조병옥·장면·윤보선·곽상훈·박순천·김도연·백남훈·김준연·유진산·오위영’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서상일·장택상·임흥순·신도성·윤제술·송방용·김의준·김수선·황남팔 등은 대열에서 이탈한다.
민주당은 1955년 9월 18일 ‘시공관’에서 발기인대회를 개최해 4백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중앙위원회에서 신익희(구파)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최고위원에는 조병옥·백남훈(민국당계 구파)·장면·곽상훈(원내 자유당계 신파) 등이 안배된다. 한편 신당 창당과정에서 이탈한 민국당계의 서상일·신도성은 혁신계의 박기출·윤길중·김달호·조봉암 등과 함께 진보당 결성에 가담한 후 민주혁신당으로 떨어져 나간다. 90년대까지 김영삼과 윤길중의 정치행적이 어떻게 굴절하는지는 또 다른 관심사다.
5·15 정·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당 헤게모니를 놓고 암투한다. 민주당 지도부는 구파측에 신익희·조병옥, 신파 측에 장면·곽상훈·박순천이 최고위원으로 있어 신파가 우세했다. 그러나 신익희가 대표최고위원으로 있어 어지간히 세력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이때부터 4·19가 발생할 때까지 민주당 신?구파 간 갈등과 암투는 계파정치사에 중대한 골을 판다.
민주당은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직후에도 4·19를 예상하지 못한 채 대여투쟁방법에 이견을 보인다. 구파는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하고 신파는 이를 거부한다. 4·19 이후의 정국수습방안에 대해서도 양측은 의견을 달리한다. 신파는 ‘선 선거?후 개헌’을, 구파는 자유당 의원들과의 협조를 통해 ‘선 개헌?후 선거’를 주장하며 대립한다. 신파는 개헌을 하지 않거나 대통령 직선제라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 구파의 내각제 개헌안을 반대하다가 국회에서 내각제개헌 후 총사퇴하기로 결의한 다음날인 4월 27일까지도 내각제 개헌은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도정부 아래에서 내각제개헌안이 통과되고 총선이 7월29일로 결정되자 양파는 단 한명이라도 자파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파쟁의 길로 들어선다.
4·19 이후 자유당은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유당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결코 취약하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정치 세력화할 수 있는 기반마저 무너진 건 아니었다. 이들 세력은 장면 정권의 민주당 신·구파 갈등구조로 안기며 소생하기 시작한다.
자유당 붕괴에 관해 한승주는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종로서적, 1983)에서 이렇게 말한다.
“과도 기간 중 재미있는 현상의 하나는 당시 혼란상황을 개선하려는 각각의 노력에서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 사이에 있던 여러 번의 협력관계다. 그들은 두드러지게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정치엘리트와 일반국민에게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의원내각제 헌법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에 의하면 이러한 헌법 개정은 현존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하며 국회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국가의 유일한 합법적 입법기구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러한 헌법 개정을 반대하거나 국회해산의 요구는 혁명목표에 반하는 것이었다. ··· 이 기간 대부분 정치인에 관한 중요한 양상의 하나는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서 공적인 것보다는 개인적 고려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정당에 관한 관심이 정치체제 전반에 대한 관심보다 더 앞섰다. 파벌 구성원에게는 한 파벌의 이익이 그 파벌이 속해 있는 당의 이익보다 더 중요했다. 동시에 파벌의 이익마저도 단순한 개인적 유대나 개인적 이익에 의해 희생시켰다.” (66-76쪽)
이같은 주장을 2공의 민주당 계파분석에만 국한하긴 어렵다. 한국의 계파정치는 1·2공 당시 전통야당과 그 모체를 이룬 각종 이질적 정치세력들 사이의 인연 혹은 정치적으로 은폐된 개인의 욕망을 핵으로 자라나기 시작한다. 세대와 환경을 달리한다 해도 오늘의 정치인들 역시 개인 욕망에 따른 계파 내 분화와 이합의 정치문화에 여전히 강하게 지배받기 때문이다.
정치인들 개개인이 제도나 정당 혹은 정치체제나 정부형태라는 거시개념보다 각자 누릴 수 있는 권력 지분 같은 미시 동기에 사로잡히는 기형적 정치문화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출발, 건국과 4·19 전후 더 활성화하기 시작했고 이같은 문화가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직업 정치인들이 정치에 입문한 후 오늘까지 과연 몇 번의 당적 변경과 계파의 이합집산을 반복했는지 그 행적을 뒤쫓자면 치밀한 경력 검색과 통계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특히 현재 각 계파 보스(정당대표)들의 표류경력과 앞으로의 변신은 추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정치인들의 치열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2공의 집권여당이 된 민주당 안에서 더 강해진다. 민주당은 4·19 이후 권력공백의 보완과 민주주의의 제도화보다 민주당 신·구 양파의 헤게모니 향배에 열중한다. 이 과정에서 계파안배와 균형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닌다. 계파운용의 균형은 달라진 정치 환경에서도 자유당 당세를 상당부분 흡수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계파정치의 모순은 부분적으로 5·16의 간접 명분을 제공한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까지 계파는 주로 지도자 개인을 중심으로 인맥 관리에 치중한다. 하지만 민주당은 내세울 지도자가 변변찮은 상황 속에서 권력배분을 의식한 파벌구성원들의 이합집산만 커진다. 분명한 보스가 없다는 것은 계파의 내부 결속과 계파 간 상호관계 모두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점이 정부의 통치력과 총리의 지도력을 크게 약화시켰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민주당 신?구파의 적대관계는 그들의 판이한 이념적 오리엔테이션이나 사회경제적 기반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 인연이나 즉각적 이해관계에 기초한다. 그러니까 이들 간 경쟁은 상당부분 개인감정이나 반감에서 비롯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대결이나 새로운 이념대안을 통한 양 계파의 진로모색이란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모두 같은 정책들을 제시했고 노선 상 보수우익의 틀 안에서 각자 사익(私益)을 키워나간다. 게다가 이념이나 정책 혹은 대중의 이익에 기초하지 않은 경쟁적 계파대결은 자연스럽게 감정대립이나 인신공격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신·구파 간 파쟁을 이끈 치명적 원인은 구파가 한민당과 민국당의 정통을 잇는 당 주류란 자부심으로 신파를 지나치게 배척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파는 구파를 ‘사라져야 할’ 세력으로 보고 당내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는 각오로 응수한다. 이러한 헤게모니 쟁탈은 양파의 감정을 격화시키는 직접적 배경이 된다. 결국 민주당 정권은 양파의 격렬한 파쟁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집권 9개월 만에 분당한다. 당내 계파의 각료직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네 차례나 개각을 단행하지만 마지막 개각 12일 만에 결국 5·16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