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남남갈등의 한국정치’ 남기고 서둘러 떠나신 유세희 선생님께 박종성 올림
우리는 어쩌자고 우리끼리 싸워야 하는 걸까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학교 은퇴교수] 애써 쓰신 책이 세상에 나온 건 홀연히 떠나신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처럼 서둘러 가실 나라였는지, 아니면 가셔야 할 다른 까닭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남은 사람들의 황망함이란 이제 넘어야 할 숙제입니다. <남남갈등의 한국정치>라는 책 제목을 두고 보면, 까닭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아니란 생각을 해봅니다. 안에 답이 들어 있는 듯도 하여서입니다.
그 해 봄날은 눈이 부셨습니다. 강의실 동창으로 밀려드는 오십 년 전 햇살이라고 어디 달랐겠습니까마는, 등 뒤로 받아내는 봄볕보다 막 유학 끝내고 들어오신 선생님 모습이 환해서였지요. 청춘은 왜 빛난다는 건지 그 날 알았으니까요. 교수란 저러하며 대학의 강의는 이렇구나 깨닫는 동안, ‘공부는 곧 집중’임을 가르쳐 주신 것도 한 날이었습니다. 개나리 흐드러지고 벚꽃 환장할 봄이었어도 앎에 기갈난 젊음을 향해 물 뿌려줄 어른들은 귀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봄은 저희의 시작이자 끝이었습니다. 봄날의 따뜻함이 겨울로 바뀌는 건 삽시간이었지요. 지리한 휴교와 기약 없는 방학이 마구 뒤섞이는 동안, 데모조차 할 수 없도록 손발 묶인 저희가 갈 데라곤 캄캄한 극장 아니면 지하도 벤치였습니다. 남산 길 걷다 지치도록 뛰어도 울기는 팽창하고 영화가 행여 출구일까 기대하며 온종일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고 또 봐도 세상은 축축하였습니다. 이른바 ‘긴조(긴급조치의 줄임말) 세대’의 비애가 부끄러워서라도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허기지고 써도 써도 몽매하기만 한 대학생활은 개학한 날들보다 문 닫은 나날이 훨씬 길었으니까요. 이 나라 대학들은 공수부대 놀이터였으니까요.
선생님을 지탱한 학문의 기둥이 ‘정치변동’과 ‘공산주의 연구’임을 안 것도 그즈음이지요. 4·19를 온몸으로 겪고 누구도 쉬 파고들지 못한 공산주의 공부를 정면에서 돌파하려 애쓰셨다는 것도 그때 알았지요. ‘서울대학교 문리대 4·19 선언문’ 작성을 주도하고 유학 시절 학위논문의 주제가 ‘강점기 조선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이었다는 건 가슴 뛰는 사실들이었습니다. 선언문의 압권은 이랬습니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힘없는 자들마저 군중 안으로 끌어들인 건 스물한 살 청춘의 열정이 정점을 찍을 때였던 셈입니다. 어른들은 두려워했고, 노인들은 연약하였으며, 여성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4·19 하루 전날, 어머니 손잡고 덕수궁으로 봄 소풍 갔던 초등생 1학년의 눈에 들어온 시청 앞 군중은 물 샐 틈조차 없었습니다. 대학생 형들이 격정을 토로하고 한 사람이 목이 찢어져라 외치면 또 다른 이가 이어 외치는 함성의 릴레이가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습니다. 14년 다시 흘러 머리가 컸어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길가의 전봇대에 하릴없이 머리나 부딪던 그때 제 나이도 공교롭게 스물하나였지요. 4·19가 5·16으로 꺾여버리는 곡절이나 ‘민간인복을 입은 군인’들이 좀체 권력을 놓으려 들지 않는 이변의 정례화도 결국 나라가 겪어야 했던 폭력의 연장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이 그렇게 무너지고 강점기가 그처럼 이어지며 해방과 분단이 쌍雙으로 다가와 그토록 오래 지탱하는 속내도 따지고 보면, 폭력의 균형을 도모하려는 보이지 않는 힘의 대립이 원인 아니었을까요? 차라리 사회혁명의 경로를 통해 우리 스스로 조선의 붕괴를 막았거나, 일본의 강점 또한 자발적으로 물리쳤다면 비극은 통쾌하게 종결되었겠지요. 저들이 강제로 나눠 고착화시킨 반도의 분단도 오롯이 남북한 당사자들이 녹여 없앨 역량으로 넘쳐났다면, 그 정치적 자율성이야말로 눈부시게 빛나는 우리들의 자원이 아니었을는지요.
폭력이 폭력을 낳는 건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적을 밖에서 찾지 못한 우리는 우리끼리 싸웠습니다. 힘센 나라가 던져주고 간 덤 같은 선물치곤 혹독했습니다. 아니, 지금도 치열합니다. 이제는 오순도순 머리 맞대며 같이 걸을 수도 있겠건만, 타협은 배반이고 협력은 일탈이며 희생은 바보의 전유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랩니다. 가질 수 있는 건 유난히 적고 가지려는 자들은 헤아릴 수 없으니 다툼이야 당연하지만, 쉽사리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 깊이 자라나는 시기와 질투는 콩 줄기보다 강인한 나날입니다. 저들이 움켜잡기 전에 내가 차지해야 한다는 악다구니 밖에 나라의 정치 곳간에는 남아 있는 보배가 이제 없습니다.
그나마 공부의 돌파구 노릇을 해준 건 홀로 읽은 책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무언가 가르쳐주지 않는 세월 속에서 차라리 공산주의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고 말씀해주시지 않는 선생님이 한때 야속했던 적도 있었지요. 그마저 독학 대상이 된 외로운 길목에서 만난 클래식은 <논어論語>였지요. 특히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은 저의 눈과 발을 움켜잡았습니다. “많이 듣고 의심스러운 것들을 빼놓으며 남은 것들을 신중히 말하다 보면 허물이 적다. 많이 보고서 위험한 것들을 빼놓고 나머지 것들을 조심스레 행하다 보면 후회할 일이 적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실에 후회가 적으면, 소득은 의당 그 가운데 있다.(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보다 더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아주리라 기대하며 읽은 고전은 한층 어려운 물음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선생님과 공자, 그리고 저 자신을 트라이앵글로 엮어 때로 겹쳐보는 동안 갈피 잡긴 더 어려웠습니다. ‘선생님께선 공자의 권유대로 살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를 따랐다면 격문을 든 채 문리대 교문을 뛰어나가지 않았을 것이며 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지도,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논어도 고스란히 따를 전거典據는 못 된다’는 판단의 충돌을 혼자 추스르긴 버거웠습니다. 물론 공맹의 고고함이나 유불선의 표상을 앞세우며 통쾌하게 일갈一喝하신 적은 한 차례도 없던 선생님이셨지요. 저만의 부대낌이자 혼돈의 나날일 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 말로 옮기는 분이셨습니다. 더더욱 공적인 자리에서 그 역逆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듣는 이들에겐 눌변訥辯으로 비칠 때도 있었고 천천히 말씀하시는 모습이 답답한 적도 잦았지요. 젊은 날 ‘혁명가’였다고 모두가 뜨거운 건 아닐 것이며, 격정의 과거를 품는다고 모두가 청룡이나 맹호일 필요도 없으리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상례가 되고 반드시 어느 틀 안에 나를 가두어야만 배우고 익히는 일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생각에까지 이르자 선생님의 ‘넘나듦’과 ‘자유’는 어느덧 두툼한 쇠망치가 되어 제 뒤통수를 내려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덕도, 노선의 전환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따뜻하며 스스로 얽매이지 않되 아무도 강제하지 않으시려는 선생님의 일상이었습니다.
혁명은 기억이고 사상은 추억일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께선 진작부터 두 단어의 탈신화화를 고민하고 계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 구질구질한 세상 미련 없이 떠나신 게 아닐는지요. 아직도 ‘혁명’과 ‘사상’의 두터운 갑옷을 벗겨드리지 않은 건 정작 우리였을 겁니다. 이제 그 천근 같은 외투일랑 기억의 옷장에 걸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자유를 시늉하겠습니다.
‘나는 비록 공자처럼 살지 않았으나 너희는 모쪼록 그리하지 말라’는 권고로도 이해하겠습니다. 아니, 그 반대일는지 모른다고 여겨도 보겠습니다. ‘나는 공자처럼 살려 애썼지만, 꼭 그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고 여유롭게 웃으시는 선생님 얼굴과 함께 말입니다. 노여워도 노여워하지 않고, 분노마저 다시 억누르던 선생님이 저희는 때로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호통이라도 치거나 길고 긴 야단이라도 무릅쓰셨다면, 모두는 당장 선생님 품으로 달려들었겠지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누구처럼 살든 말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사노라면 가슴 뜨거워지는 날 기어이 올 테고 그날이 오면 불같이 덤벼들어 자기를 태우든, 남을 돕든 뭐라도 하나 옳게 하고 떠나라’고 말씀이지요.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걱정은 남습니다. 계시는 그곳에도 폭력과 갈등이 있는지, 적敵 또한 엄연한지, 밖에서 찾아야 할 적을 우리처럼 안에서 찾고 끝나지 않을 싸움으로 모두를 망가뜨리는 일은 없는지, 정말이지 거기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도덕을 정치의 기준으로 삼는 깔끔한 세상이 올 때까지 아무래도 이곳은 좀 더 시끄러울 모양입니다. 그래도 줄곧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어느 쪽이 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하며 싸우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