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完] 4·13 총선서 고질적인 ‘한국병’ 얼마나 치유될까?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다음 표는 이명박 정부 4년차인 2011년 7월 현재 한나라당의 세력판도와 정치적 영향력, 동원정도를 잘 말해준다. 특히 당시 전당대회가 대의원들의 투표권 행사뿐 아니라 일반당원을 포함한 선거인단과 청년선거인단 등 비교적 당성이 옅은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면 선거결과의 의미는 적잖았다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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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언제 어디서 뭘 말하고 또 어떻게 행했는지 각 계파 단위에 관한 정밀 추적은 끝없이 이어질 역사의 기록과 의미파악 앞에서 이제 호흡을 정돈할 필요를 느낀다. 그건 곧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대권장악과 자기이익확장을 위해 한사코 탐욕의 속내 가리며 치러야 할 계파들의 ‘시간벌기’와도 직결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솟구치는 정치본능을 불태우는 이들의 표류와 이동이 장차 어떻게 변할는지 냉정하게 관찰해야 할 학문의 역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계파정치’가 현재로서의 역사성을 지니는 민감한 연구대상이자 관찰자 모두의 각별한 비판적 근력을 요청하는 일임도 물론 아우르며 말이다.

이 땅에 정치계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문제의 핵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사라질 조짐은커녕, 계파가 주변 계파를 강하게 의식하며 그들을 능가할 궁리로 늘 골몰하거나 적어도 경쟁에서 밀려선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 사고의 합리성을 잃어버리기 쉬웠다는 게 문제다. 뿐만 아니라 ‘있던’ 계파를 졸지에 없애버리거나 주변의 또 다른 ‘그들’과 합쳐 버리는가 하면, 홀로 ‘빠져나가’ 기탄없이 ‘숨어들며’ 또 다시 어딘가를 향해 홀연히 ‘사라지는’ 배반의 행각이 주목해야 할 대상이었다.

변절보다 무서운 건 그래서 권력을 향한 조바심이다. 그저 바라만보다 되돌아설는지 모른다는 불안이 싫었고 혹여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죽음보다 깊은 혐오로 자신을 감쌀 때 ‘계파’는 그 같은 부정(否定)의 심리를 달래고 숨기기 좋은 정치적 핑계로 존재했던 셈이다. 따라서 내가 ‘아니라면’ 그도 ‘아니어야만’ 했고 내가 ‘모르는 것’이라면 그 역시 ‘몰라야만’ 하는 기이한 공평(公平) 혹은 균형의 감각이 요긴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정치적 시기와 질투의 균형으로 집약된다. 한 사람밖에 거머잡지 못할 ‘대권’이자 둘일 수 없는 ‘실세’라면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경쟁자들의 각축과 알력은 모두가 궁극의 용서나 화해를 목적으로 한 갈등이 아니다. 대신 한으로 응어리지거나 언젠가는 통렬한 승리로 상쇄해야 할 과거의 업보로 차곡차곡 쌓여갈 계파 구성원 각자의 잊지 못할 사연이다.

보스의 속내를 잘 알면서도 직설적 비판이나 적합한 공격으로 계파의 비민주성을 극복하지 못했던 건 자기지분의 영원한 상실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이를 예비하는 공포의 사전배제나 그 제어 때문이었을까. ‘그’를 따라 천신만고 걸어온 풍랑의 세월이 ‘항심(抗心)’과 ‘비례(非禮)’에 묻혀 최소한의 권력조차 보상 못할 일이라면 차라리 참고 챙기거나 등 돌리며 자취 바꿔서라도 확보할 일신(一身)의 안일이 한결 아쉬웠던 것이다. 그것이 이 나라 계파가 넘지 못한 두텁고도 덧없는 인연의 벽이었다.

은근하고 비밀스러우며 보이잖아도 보이는 ‘그것’. 게다가 끈적이는 거미줄 같은 파벌세계에 그렇다고 누구든 걸려드는 건 아니다. ‘진입’과 ‘퇴출’이 자유롭진 않되, 그러나 배신의 기회란 늘 열려 있고 뛰쳐나가도 되돌아 올 명분만 그럴듯하면 용서의 계기마저 마련되는 ‘그곳’. 저 희한한 면피의 쌍방통행로와 ‘고비용·고부가가치’의 변신 계기 또한 널리널리 열려있는 응달진 공간. 아직도 거기서 음험한 한국정치는 기꺼이 배양되고 ‘민주’와 ‘자유’를 가장한 그늘의 논리가 턱없이 양산된다.

사라진 듯 사라지지 않고 재생된 듯 다시 자취 숨기는 계파의 역사가 정치사의 여전한 축 하나를 형성하는 한, 민주주의라 믿고 있는 그것은 허울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제도’도 ‘원칙’도 아니며 합목적적인 정당 ‘조직’이나 ‘기구’는 더더욱 아니다. 계파는 단지 자기중심적 권력팽창을 꿈꾸는 자들의 치사한 도구일 따름이다.(끝)

*그동안 박종성 교수의 [한국의 계파정치]를 애독해주신 <아시아엔>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국정치가 4·13 총선을 계기로 독점적·이기적 계파를 극복하고 생산적인 소통의 계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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