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61] 친이·친박의 분화 촉진한 이명박 정권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6대에 이어 17대 대선에서도 정동영은 꿈을 접어야 했다. 노무현 후보를 좇아 민주당 국민경선의 전국투어를 완주한 16대 경우와 달리 정동영은 민주당후보로 출마했지만 2007년 12월 19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다. 2008년 4월 9일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지역구 131석과 비례대표 22석을 합해 153석으로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한다.
2008년 2월 17일,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출범한 통합민주당은 거대 여당을 견제할 중도개혁세력 결집을 표방, 총선에 임했지만 지역구 66석과 비례대표 15석을 합해 총 81석을 얻는 데 그친다. 그해 7월 6일, ‘그들’은 급기야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다. 한편 2008년 2월 1일, 충청도를 기반으로 하되 이회창을 중심으로 창당한 자유선진당은 총18석(지역구 14·비례대표 4)을 얻은 후 2월 12일 국민중심당과 통합한다. 자유선진당은 이어 3석(지역구 1·비례대표 2)을 얻은 창조한국당과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구성, 원내교섭단체가 된다.
이밖에 총 5석을 얻은 민주노동당과 민노당 탈당세력이 창당한 ‘진보신당연대회의’와 한나라당 공천낙천자들로 친(親) 박근혜계 인사들이 창당한 ‘친박연대’ 등이 정당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새로운 정권의 캘린더는 장을 넘길 채비를 마친다.
간만에 집권여당이 된 한나라당의 감격은 민주당의 울기와 회한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민주당으로선 유전에 유전을 거듭한 자신들의 정치적 곤혹이나 쑥스런 여정보다 다시 야당역할을 불사해야 할 처지가 착잡하였을 터다. 가졌다 되물린 권력의 아련함보다 이제 또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과거의 정치적 곤경이 새삼 또렷이 떠오르는 ‘그들’에게 한나라당의 존재는 단순한 미움 이상의 대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장 보장받을 수 없는 5년 뒤 대권을 곱씹으며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단지 81석만이라도 끌어안은 채 과거의 정책실패와 정치적 과오를 되돌아보며 최대한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한나라당 역시 권력의 ‘쟁취’가 능력과 역사의 평판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무능과 교만이 빚어낸 결과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여권을 향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얼마나 복잡한 속내를 담는지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선거 때만 되면 가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지 ‘철회’이자 정권심판으로 집약된다. 총선과 지방선거가 그랬고 정례화한 대선의 소용돌이가 이를 잘 반증한다. 이 대목에서 확실한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세기의 전환 이후 고착화한 한국정당의 양강 경쟁구도다. 게다가 다수당 구조의 길항과 명멸현상이다. 한나라당의 상대적 ‘안정세’는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김대중 집권전후 세 차례 대선을 치르며 당의 경쟁력을 쌓아 온 ‘그들’의 과거와 돌고 돌아 도로 민주당이 된 야권의 처지가 적수(敵手)의 균형으로 제도화한 것만큼은 주목할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당’의 역사적 부침이나 이에 관한 온갖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보자면, 당 창건 후 10여년 만에 대권을 장악한 한나라당이나 갖고 있던 권력을 고스란히 내준 민주당 상황이란 한사코 제로섬 콘셉트로 보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그들은 이제 선거 때만 되면 정당을 급조하거나 흩어지고 모여들던 ‘부나비’의 행각을 서서히 버려가고 있었다. 나아가 두 정당은 전환기 권력구조의 제도적 공급원으로 안정적 작동을 기대해도 좋을 만큼 숙성되어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수백 년 지탱해 나갈 실질적 건강성을 표방한다거나 명실상부한 정치적 다원성을 드러내는 제도경쟁의 단위들로 자리할 것인지는 물론 애매했지만 말이다.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가 순차적으로 시행되는 정치일정은 사회경제적 비효율과 함께 온갖 비용의 과다지출로 숱한 지적과 비판을 받아왔다. 노무현은 집권 중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개혁안에 골몰했으나 현실화시키지 못한 채 임기를 마친다. 이명박의 집권은 이 문제 자체에 관한 제도적 극복보다 국가적 현안해결에 매달리며 관행의 반복을 ‘현실’로 수용해야 할 한계를 드러낸다.
집권 초부터 미국산 수입 쇠고기파동과 용산 철거민 참사로 곤욕을 치른 이명박 정권은 관례적 일정 이외의 정치실험이나 파격적인 ‘제3의 길’ 따윈 좀체 도모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양당의 입장과 정치적 자세 역시 암묵적일 수만은 없었다. 이미 대권을 장악한 한나라당 내부 사정이나 정권을 되찾겠다는 노스탤지어에 강하게 시달린 민주당이나 ‘절박하기’로는 어느 한쪽도 꿀리지 않았다.
18대 대선을 향한 한나라당의 경쟁구도는 이원구도로 진행·심화된다. 잠재적 대권주자 가운데 압도적 우위를 점한 박근혜의 추종세력과 이를 방임·좌시할 수 없었던 친 이명박 집단의 대결이 여권의 경쟁 축을 형성하는 가운데 이른바 빅3로 알려진 ‘정동영·정세균·손학규’ 외에 ‘박주선·천정배·조배숙·이인영·최재성’ 등이 민주당 당권장악과 그 ‘이후’를 위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이명박의 임기 중반을 넘어서는 2010년 7월과 10월, 각기 치러진 양당 전당대회는 당대 여야계보와 차기권력을 겨냥한 영향력 분포를 가늠할 좋은 계기가 된다. 다음 표는 이들 사이의 힘의 차이를 잘 말해준다. 민주당보다 석 달 먼저 전당대회를 치른 한나라당은 당시까지 잠재적 대권주자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던 박근혜 계의 미미한 실적이 돋보인다. 반면, 이명박 계의 여전한 전진과 당내 영향력 행사가 두드러진다.
이 또한 ‘현직incumbency’의 프리미엄과 예측 불가능한 미래 사이에서 혼돈과 집착의 골을 오가던 당인들의 정치심리를 잘 대변한다. 이명박을 향한 평소의 친소정도와 이를 빌미로 한 영향력편차에서 변별력을 달리한 (이른바 ‘친이계’와 ‘범친이계’란 용어는 사실상 언론의 조어 결과에 따른 것이지만 결국 권력 ‘주변’과 ‘측근’ 사이에서 결정된) 당권의 향배는 위와 같다.
계파별 득표수 합계는 물론 달랐다. 대의원 투표를 기준으로 삼을 때 ‘1인2표제’도 감안해야 할 변수였지만 차기 대권쟁취란 숨기지 못할 본능이자 그만큼 절박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2010년 7월의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명박의 잔여임기 동안 어느 계파가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며 이를 대선으로 연결·강화할 것인지 가늠할 좋은 기회였다.
그 결과는 두 세력의 힘의 길항과 각축으로 요약된다. 실질적 파괴력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채 거의 더블 스코어 이상의 편차를 끌어안아야 했지만 박근혜 계의 전진배치와 이명박 계의 수성전략이 관전의 한 축이고 이명박 지지 세력의 내부균열이 또 다른 관찰대상으로 남는다. ‘범친이계(안상수·홍준표·나경원·정두언·김대식·정미경)’의 9,827표와 ‘친박계(서병수·이성헌·한선교·이혜훈)’의 4,520표만 보더라도 편차에 나타난 대결 윤곽은 분명했다. (중립계 김성식 533표 배제)
‘범친이계’란 표현도 따지고 보면 보도와 여론조성의 한 축을 형성하는 언론의 궁리 때문이었지만 그 이상의 조어도 사실 쉽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같은 당 울타리 안에 적(籍)을 두고 있다곤 해도 ‘뜻’과 ‘전략’이 다르고 ‘재주’와 정치적 ‘활동방식’ 자체가 제각각 같잖은 이들의 강제공존이 당대 한나라당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대통령을 바라보되, 다음 대통령 만들기의 꿈과 그 속에서 운신할 자신의 범위는 달랐고 기대고 업힐 리더 찾기란 간단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