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3] 5·16 쿠데타 주역 김종필의 공화당 창당 작전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파쟁의 불씨는 특히 사무국의 이원 조직에서부터 싹튼다. 출신배경을 달리하는 인적구성으로부터 파쟁을 향한 이질적 신호가 울려나온 것이다. 민정이양을 전후한 1963년 1월, 공화당 창당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무리짓기’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주체세력 △민간발기인들 중 노장층 △민간발기인들 중 소장층과 중앙·지방사무국 간부 등 세 계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훗날 공화당 주류·비주류·당료파의 전신(前身)이다.
그러나 공화당내 본격 계파분화에 앞서 쿠데타 주체사이에는 김종필을 지지하는 친김(親金)계와 그를 반대하는 최고위원 그룹중심의 분열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반김(反金) 노선은 공화당의 이원 조직이 이른바 사이비 민주조직이라고 비판한 최고위원 유원식·김동하·송요찬 등을 주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들 간 알력은 번번히 박정희의 직접 개입으로 조정의 길을 찾는다.?‘친김-반김’의 알력이 있었지만 박정희의 개입으로 조정 가능성이 보였다는 사실은 당시 박정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단적으로 반증한다. 김종필은 당시 박정희의 막강한 후원과 심정적 지원을 등에 업고 민주공화당 창당을 주도한다. 특히 양 세력의 갈등은 김종필 개인이 구상한 창당플랜과 당 조직운영을 위한 인적 구성과 관련해 깊어지기 시작했고 여기서 쿠데타 주체들 간의 내분은 박정희를 둘러싼 그들 사이의 미묘한 라이벌 의식에서 비롯된다.
김종필 개인의 창당플랜을 보면 △공공조직 △점조직 △핵심조직 △영도권 확립 △범국민적 조직 아래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우고 있다. 첫째, 공공조직의 경우 1)개인중심을 지양하며 2)선거부패를 방지하고 3)당 소속 국회의원이 본연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며 4)인물에 대한 충성을 지양하고 공익을 위한 충성을 유도하도록 했다. 둘째, 점조직의 경우는 1)계파를 배제하고 2)개체의 자립성을 확립하고 일체의 연계는 당의 기구를 통하도록 하며 3)이념 중심으로 결속하도록 했다.
김종필은 핵심조직의 경우 1)선거 때와 평상시 구분 없이 계속적인 조직 활동을 펴며 2)일선 당원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한편 3)계속적인 이념의 전파와 교육으로써 국민의 정치의식을 높이는 역할을 맡기도록 했다. 그는 영도권 확립을 위해 △지도체계를 단일화하고?△강력한 통솔력을 확립하며 △운영책임 및 관리는 최대한 신속하게 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김종필이 세운 범국민적 조직은 △선거구의 이익보다 전 국민적 복지를 추구하며 △각계각층을 망라한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민족공동의 목적을 추구해 △민족 지도층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창당의 난관을 거쳐 6대 국회에 110명의 의원을 배출한 민주공화당 1세대는 새로운 계파구조를 확대 재생산한다. 1960년대 전반을 통해 이들 계파구조는 크게 6개 계보로 확장된다. 이들은 각자의 출신배경과 개인적 친분관계, 그리고 시국관 등으로 복잡한 관계를 이루며 점차 야권과 유사한 이합집산을 경험한다. 특히 이들은 창당 당시 3대 계보를 축으로 세포분열을 시도, 사무국 조직운영을 둘러싼 애초의 갈등을 키우면서 독특하게 내연(內燃)한다. 이들은 우선 쿠데타 주체세력·사무국계·구 자유당계로 갈라져 대결하고 그 위에 친김 라인과 반김 라인의 정치복선(政治伏線)이 교차하면서 복잡한 계파의 가닥을 잡는다. 무엇보다 과거 1·2공의 구 정치세력들이 다시 3공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당내 파벌 판도변화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한다.
3공의 계파들은 6대 국회의 요직인선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대립한다. 당시 공화당은 원내총무단 구성에서 주류인 김용태를 총무, 부총무에는 구 자유당계인 최치환과 당료계인 예춘호를 지명하는 등 계파 간 안배 원칙을 적용한다. 한편 당의 고위요직은 ‘김종필-김용태’ 라인을 주축으로 삼는 쿠데타 주체들이 장악한다.
그러나 ‘김-김 라인’은 곧 무너진다. 한일회담 문제로 여야가 팽팽히 맞선 1964년 4월25일, 국회에서 야당이 제안한 엄민영 내무·김유택 경제기획·원용석 농림 등 세 장관에 대한 불신임 건의안을 표결할 때 공화당은 이를 간신히 저지하지만 당 소속의원 20여명이 야당에 동조한다. ‘크로스 보팅’ 전통이 전혀 없던 한국정당사에서 이는 여권을 긴장시켰고 묵과할 수 없는 반당행위로 인식된다. 원내 비주류 대부분이 가담한 이른바 표의 반란을 계기로 당내 주류·비주류 간 대립은 본격화한다. 이 때 주류는 쿠데타 주체와 당료계였고 나머지 쿠데타 주체 중 반김계와 구 정치세력은 비주류에 가담한다. 이때부터 시작된 격렬한 당 내분은 계속 당 영도체계를 약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