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9] ’87대선’ 양김 분열과 노태우 당선···낮은 득표율, 3당합당 ‘맹아’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박정희가 거세되고 김종필마저 위축·배제된 상태에서 제도 권력을 넘겨받은 최규하는 난국을 수습할 수 없었다. 그에겐 행정 관료의 이미지만 가득했다. 전두환은 정치적 과도기를 수습해야 할 불가피한 존재인 양 자기 공식위상을 합리화하는 한편, 실질 권력접수를 향한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러한 교체기를 거쳐 ‘하나회’는 민정당 창당과 5공 전반에 걸친 정치권력안배 혹은 집행에서 은밀한 모체 계파로 기능한다.

일사불란한 위계에 따라 정치적 힘을 안배하려던 신군부 계파는 그러나 민정당 2기 집권을 맞아 크게 흔들린다. 파열조짐은 육사 11기 동기생들인 ‘전두환-노태우-정호용’ 3인의 권력 지분 주장과 이에 얽힌 자기이익 추구과정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는 과거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그러한 알력은 민정당이 5공 집권여당에서 6공 집권당으로 변신하는 과정상 불가피하다고 모두가 내다본 일이다.

13대 총선에 나타난 ‘여소야대’ 상황은 민정당 공천과정부터 분명했던 노태우와 전두환 사이의 지분경쟁결과였다. 선거결과가 여대야소로 나타났다면 당의 비극은 별로 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87년 봄’은 민정당내 계파분화를 재촉하고 당의 위기마저 가속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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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로의 권력이양은 민정당내 권력재편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전두환 친위세력이 득세하던 당내 권력구조는 노태우 친위세력을 중심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역사의 반복과 이변은 용납되지 않았다. 5개월 사이에 치러진 13대 대선과 13대 총선이란 시기의 근접성은 한낱 상징적 의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선결과는 적어도 입법부 권력변화와 견줄 일이 아니었다.

노태우는 역대 대선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을 무릅써야만 했다. 36.6%의 지지만으로도 그것이 ‘종다수(從多數)’이기 때문에 인정해야만 했던 기형적 승리였다. 반사논리로 보자면, 총유권자(기권자 포함) 중 63.4%가 ‘원하지 않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다. 유권자들은 여소야대 정국이나 과반수 미달로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냉소적이었지만 6공 수뇌부는 이와 전혀 관계없이 자신들의 정치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4공의 ‘체육관선거’ 유산을 등에 업고 소위 ‘합헌절차’에 따라 직접선거에 의하지 않은 정권을 출범시킨다. 그것은 중대한 ‘정통성 위기’의 단초였다. 이와 비슷한 위기는 노태우 정권의 표의 한계로 되풀이된다. 게다가 새로운 위기와 권력의 한계를 암시하는 신호는 민정당내 계파 이동과 반란으로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계파 대이동을 포함한 변칙적 정치변동은 6공 출범과 함께 예고되고 있었던 터다. 한국정당사에서 피할 수 없는 계파 대란은 80년대 말에 이르러서도 고질적 궤도를 탈출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신군부의 연장과 파벌의 대란

노태우 정권은 시작부터 취약한 통치 명분과 싸워야 했다. 여기서 ‘취약’이란 말은 노태우의 당선과 집권 프리미엄이 과반 이하의 득표로도 가능했다는 표의 제한성과 압도적 거부의 한계를 동시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노태우 역시 박정희가 비축한 경제 인프라를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리더십은 곧 바닥을 친다.

노태우의 탈권위주의 통치방식 역시 의도적 정치공학이었다. 노태우는 정권말기까지 정치적 방임과 무위(無爲)의 명분을 민주주의논리로 수식해 그의 통치방식 자체가 민주화의 완성을 위해 피할 수 없는 단계임을 반복 강조한다. 마치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매우 많은 일을 해내는 것’처럼 비치게 하려는 엔지니어링이 세상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이같은 명분은 얼마만큼 설득력을 갖고 있었을까? 이러한 방식이 과거에 사용된 바 없었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국의 민주화는 진전될 수 있었던 걸까? 적어도 ‘의도된’ 탈권위주의 통치는 기왕의 계파정치의 악습을 끊는 데 성공적이었을까? 한국 시민사회의 민주화 정도와 지배블록의 민주화 수준 사이에는 과연 어느 정도의 간극이 존재했던 걸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부정적이란 점에서 한국의 정치비극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6공 출범 후의 정치계보변화에서 구 공화당 인맥이 일제 부활한 현상은 뭘 뜻하는 걸까? 국회의장과 민정당 5역, 야 3당의 정책위의장까지 포진함으로써 이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같은 변화는 오랜 칩거 후 김종필이 1987년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3대 대선에 입후보하면서 재생시킨 ‘세(勢)’와 무관치 않다. 당시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가 집권여당도 아닌 신민주공화당을 이처럼 예우한 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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