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5] 박정희, 10월 유신과 함께 김종필 철저히 내쳐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0월 유신 후, 9대국회에서 유신정우회가 등장하자 공화당은 원내 제2교섭단체로 전락한다. 박정희는 73년 3월8일, 정일권 국회의장, 백두진 유정회 대표, 이효상 공화당 의장과 함께 유신체제의 뼈대를 세운다. 그러나 유정회 회원 73명 중 공화당적을 가진 김종필·백두진·구태회·민병권·김진만·현오봉·김재순 등 29명이 탈당한다. 그런가 하면 1978년 12월12일, 10대 총선에서 이후락은 무소속으로 당선, 14명의 민정회(民政會) 회원을 이끌고 공화당에 입당한다.
박정희는 끝내 김종필을 권력 핵심부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접근 가능한 길목들을 모조리 차단하고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일체의 세력을 멀리서 주시한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버티며 목숨 걸고 덤벼들던 5·16 거사(擧事)의 기억을 그는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그렇게 김종필을 버린다.
1979년 10월26일, 1980년 5월17일, 5월18일, 그리고 또 다른 신군부의 등장 등 박정희 암살에 따른 정치공백은 해방 후 4공까지의 정치모순과 계파정치의 폐단이 사라질 것이란 과잉기대를 연출한다. 그 폭발적 기대는 더 이상 정치적으로 억압받지 않아도 좋으리라는 극단적 낙관론마저 낳는다.
정치적 자유의 과잉기대와 극단적 낙관론. 둘은 서로 맞물려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은 뒤였다. 또한 이제까지의 반(反)정치적 혐오와 환멸뿐 아니라 그간의 대중의 한(恨)을 달래기 충분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누구도 또 다시 ‘민간인복을 입은 군인’이 정치무대에 나설 것이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국을 위기 속에 방치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충만한 ‘애국군인’들은 이미 동원되고 있었고 이들을 저지할만한 힘은 직업정치인들 중 누구에게도, 시민사회 어느 세력에게도 없었다. 과거 그 막강했던 어느 계파나 이합집산의 명수들이던 중간보스에게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들은 거의 다 땅 속으로, 비행기 속으로 숨어들었고 자신을 감싸줄 또 다른 보스와 ‘나타나도 좋을 날’을 기다리며 치밀한 계산을 포기하지 않은 채 1980년대의 새날들을 기약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삼았던 여권계파는 그가 사라진 정치적 진공상태 속에서도 살아남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여권 계파는 박정희를 대체할 신인이 또 다시 군부에서 등장한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한다. 표면적으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그것만으로 계파정치의 뿌리 깊은 모순을 제거하기엔 신군부 역시 역부족이었다.
얼핏 보면 5공의 계파구조는 과거와 단절된 듯하다. 그러나 구조의 상층부를 감싸는 베일을 한 꺼풀 벗겨내면 내용물은 4공까지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변화는 박정희 인맥의 상당부분이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전두환의 인맥구조로 대체된다는 점이다. 정치활동 금지조치해제 후 김영삼과 김대중을 정점으로 한 야권 계파는 또 다시 움직인다. 여권의 지각변동은 ‘군부’란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형의 변화가 없다. 기습적 정치변동을 눈앞에 놓고 야권 계파들이 크게 동요할 때 신 여권은 권력접수의 수순을 밟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향배를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