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9] ‘고은·박형규·함세웅·백기완·한승헌’과 ‘보수아이콘’ 서경석 목사는 본래 한배 탔었다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0월유신과 재야의 등장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결국 재야는 장외(場外) 정치세력화에 따른 의미를 함축한다. 유신체제에 대항하려 한 반체제 인사들 혹은 유신체제에 맞서 행동으로 투쟁하고 고통당한 세력들, 그리고 체제에 도전한 비판적 정치의식의 실천적 응결체 등으로 보아 재야의 출발점을 유신조치에 따른 일련의 정치적 억압과 분리할 수 없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들 세력은 흔히 70년대 중·후반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신의 존재이유와 활동 명분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보수야당의 대여(對與)투쟁이나 원외 비판현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10월유신 후 체제에 대한 정치적 도전은 사회 여러 하위분야에서 터져나온다. 그러나 그 힘의 분출을 일원화할만한 조직이나 창구는 없었다. 따라서 ‘힘’은 산만했고 일관성 또한 없었다. 그 결과 행동이 가시화할 경우 순간적으로 국가폭력에 포착·흡수되고 마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런 상황에서 反유신을 목표로 조직화된 본격적 체제비판단체가 유신 2년 후 출범한다.

1974년 10월 말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그 처음이다. 종교계·학계·언론계·정계인사들 가운데 강한 비판의식을 가진 인물들 50명을 발기인으로 한 이 단체는 그해 말 각 행정구역 단위별로 지방회의를 결성해 거의 같은 무렵 ‘민주회복청년회의’도 발족시킨다. 이듬해인 1975년 1월, 김병걸·이호철 등 이른바 반체제 문인들은 ‘시국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같은 일련의 초기 저항운동은 1975년 5월 선포된 ‘긴급조치 9호’로 제동이 걸린다.

산발적으로 계속된 저항운동을 재조직화한 계기는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 민주구국선언’이다. 이 선언에는 ‘윤보선·김대중·정일형’ 등 정치인과 ‘함석헌·문익환·문동환·윤반웅’ 등 기독교 인사, ‘이문영·서남동·안병무·이우정’ 등 학계인사들이 참여한다. 흔히 ‘명동사건’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건은 재야세력 일대연합의 계기를 마련하고 그 뒤 재야세력 존속의 모체가 된다.

이 사건 뒤 13개 반체제 단체들이 분화하기 시작해 다시 통합의 계기를 맞이한 것이 1979년 1월이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란 긴 이름의 단체가 출범한다. 이 단체는‘윤보선·김대중·함석헌’ 등 3인을 공동의장으로 하고 중앙위 간사격으로 문익환을 필두로 ‘고은·박형규·이우정·김승훈·예춘호·김종완·김윤식·박종태·이문영·서남동·안병무·함세웅·계훈제·김병걸·이태영·문동환·백기완·김관석·한승헌·백낙청·서경석·심재권’ 등을 중앙위원으로 한다. 이들은 1970년대 말부터 세기의 전환기까지 여러 재야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적 위치에 선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모체는 ‘민주주의국민연합’이지만 국민연합의 산파역을 맡은 반체제단체는 13개나 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유명무실했고 그나마 조직형태를 갖추었다 해도 구성원들이 서로 중복되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이들 가운데는 199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해체돼 명목상 이름만 이어간 것들도 있고 새로운 운동파벌을 접목·부활·재생시켜 다면 단체로 재조직화한 경우도 있다.

‘민주주의국민연합’은 함석헌이 이끌고 ‘민주헌정동지회’는 김종완, ‘해직교수협의회’는 성래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병걸, ‘정치범동지회’는 계훈제, ‘구속자동지회’는 윤반웅, ‘양심범가족협의회’는 공덕귀,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함석헌, ‘민주청년인권협의회’는 이우회, ‘민주회복기독자회’는 박형규, ‘교회여성연합회’도 공덕귀, ‘백범사상연구소’는 백기완 등이 각각 대표로 활동한다.

이밖에 국민연합과 직접 연계 없이 활동한 1980년대 초 재야운동 세력들로는 일부 언론계 출신 인사들과 재야법조인들, 그리고 ‘한국가톨릭농민회’와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과 김대중 직계세력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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