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⑫]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 없었다면 1997년 정권교체 가능했을까?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은 집권여당 총재란 프리미엄을 최대한 활용, 퇴색해가는 개혁의 고삐를 더 움켜잡길 원했다. 게다가 ‘전두환 노태우 구속’ 이후 국내정치적 우위를 지속적으로 선점, 대중적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집권 종반부 통치계획을 굳혀 나간다. 신한국당의 과반수 의석 점유가 15대 국회개원 전 김영삼 총재의 우선 목표였다. 실제로 신한국당은 당선자 확정발표 후 139석으로 굳어진 의석을 늘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원 구성 전까지 무소속 당선자 10명 이상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같은 정략은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대를 배후에서 기술적으로 촉진·강화하고 결국 대권 도전을 노리며 칩거하던 양김 모두를 흥분시킨다.
결과는 김대중의 승리와 진보진영의 약진으로 구체화된다. 이는 곧 뒤늦은 야권의 감격이 문제해결과 업적의 생산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정치적 부담과 마주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모처럼의 기회를 살리지 못할 경우 그들이 그토록 공격하던 과거 정권과 자신들이 크게 다를 바 없고 그 같은 한계는 고스란히 다음 선거의 부메랑이 될 것이란 경고마저 배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때를 기점으로 ‘여촌야도’의 선거문화가 근본적 지각변동을 겪는다는 점이다. 야당 지도자의 대권장악과 그에 따른 보수 세력의 주기적 재결집은 누구에게라도 한꺼번에 모든 걸 주진 않겠다는 ‘정치적 인색함’(the political parsimony)으로 노골화한다. 한번은 주고 한번은 거두어 들이는 지지의 ‘바게인’(bargain)을 철저히 반복한다.
이를 굳이 ‘일여일수’(一與一收)로 표현하면 어떨까. 김대중을 권력 정상에 올려놓은 뒤 입법부 권력은 다시 한나라당으로 몰아가는 유권자들의 정치심리란 결코 모든 걸 몰아주진 않겠다는 의도를 선명히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지지의 ‘지그재그’는 지지의 기복(起伏)과 주기적 반복이 단순한 순간의 감정이나 도발적 선택결과가 아님을 잘 말해준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야권의 지속적 권력승계는 비록 예외지만 15대 대선이후 여야의 권력부침은 해방 후 지속된 일방적 여권우위를 뒤집는 좋은 사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정치의 계파중심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정치질서 변인(變因)의 상수인 양, 정권 창출과 사수 혹은 재생산구조의 숨은 공신(功臣)집단들로 제 역할을 다한다. 계파가 이처럼 유권자들의 정치적 지지대상 변화나 개인적 무관심과 관계없이 현실로 지탱하고 있음은 비극이다. 이는 곧 서로 관계없는 듯 보이는 현상들이 얽히고설켜 나타나는 정치적 화학반응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한편 6·29 이후 한국 투표율의 착실한 감소추세는 그 물리적 단서와 생화학적 콘텐츠가 모호하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방대한 근거와 추적이 필요한 또 다른 연구과제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인 단서들을 감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는 극도의 환멸과 실망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치적 현 존재태(存在態)를 바라보는 뿌리 깊은 불신과 이를 배양한 권력구조의 태생적 한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유권자들은 왜 투표 행위 그 자체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걸까. 만일 이대로 나아간다면 이 땅의 참여 양식은 ‘일부투표-다수외면’의 양극화 현상과 직업정치인들만의 자기중심적 향연으로 굳어갈 가능성도 적잖을 것이다. 이를 치유·조절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회운동단체들이나 재야·진보의 존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이라 하여 이를 단숨에 뛰어넘을 고도의 모럴이나 정치적 잠재력을 자랑할 처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1989년을 고비로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일군의 재야세력이 크게 위축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원외에서 투쟁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뜨거운 보람을 재확인하며 끝까지 버텨보려 했던 그들의 순수한 혁명 열정은 평소 신봉하던 이데올로기가 ‘허구’임을 목격한 다음 급속히 식어간다. 제도 정치권이 유혹하지 않았어도 그 진입을 의식한 이들에게 이는 기왕의 정치적 편견을 앞당겨 폐기하도록 자극한 좋은 빌미가 된다.
3김은 14대 총선 후 이들의 흡인작업에 나선다. 김영삼은 집권 직후, 나머지 양김은 15대 총선을 전후하여 재야물색을 표면화하기 이른다. 그들의 이 같은 노력이 한결같이 자파 세력을 공고히 하고 인물 비축을 통한 세 불리기나 이를 향한 자기사람 만들기의 계산된 결과였음도 재론의 여지는 없다.
전력(前歷)은 중요치 않다. 그 대신 △향후의 역량발휘에 관심 쏟기 △충성의 크기보다 승리와 고지 탈환의 능력 여부 검증하기 △동원해낼 수 있는 인원 운용과 공·사 조직의 밀도·기동성 확인하기 △배신 가능성보다 합리적 판단과 능률성 여부 먼저 고려하기 △노동자·농민·지식인·성직자·학생 등 비판적 행동과 실천적 변혁 주체를 직접 파고들 재야의 첨병역할을 부여하는데 주력했다.
이같은 항목들은 재야·진보세력을 자기 표밭으로 인식한 계파 수장들의 자기중심성을 고스란히 반증한다. 깊이 숨기고 싶지만 머잖아 노출될 수밖에 없는 그런 정치심리의 자락들 말이다. 언제까지나 제도권 외곽에서 거칠고 기약 없는 정치적 삶의 방식을 지탱할 것인지도 재야 스스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낭만적 삶의 양식인 양 내면화해야만 했던 예전의 독립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는 주문은 집권하기 위해 배신도 불사해야 한다는 현실과는 물론 전혀 다른 일이다. 가난하더라도 의연히 살아가는 일이 재야의 어휘 그 자체에 한결 합당하거나 진보세력이 존재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은 고사하고 점차 민중과 동떨어지며 ‘그들’ 스스로도 제도 정치권의 계파화 경향을 답습하는 현실에서랴. 하물며 혹독한 생존 법칙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자기거점의 쇄신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