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⑪] ‘김영삼의 민자당’ 잇단 패배, 김대중-김종필 연대 싹 틔워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한국의 제도정치권에게 정당 구조의 불균형을 이겨낼 만한 자율적 대처방안이나 합리적 적응 메커니즘을 기대할 수 없었던 건 불행이다. 당내 민주화 실현이니, 지역감정타파니 하는 문제들 역시 이제는 너무나 진부해 기대조차 않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국 정당체계가 어떻게 정착할 것인지 하는 점이다. 이제까지는 정국 안정을 위해 양당제의 안착이 필요하다는 논리가?우세했다.

그러나 이 논리가 현실정치 운영에 반드시 긍정적이진 않았다.?우리의 경우 양당제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요구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고 이를 대체할만한 현실 정치세력 또한?미미하거나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정에서 복수정당구조의 기능적 측면만 강조하는 건 탁상공론이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13대 총선결과로 나타난 4당 체계가 중요한 검토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선거결과는 중요한 정치적 실험계기를 제공했지만 그 구현 과정을 보지도 못한 채 다당제 운용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4당 체계는?한계를 안고 있었다. 보스 개인이?장악한 인물중심정당이었다는 점에서 당 운영과 리더십의 한계를 안는다. 비록 전국적이었다고 해도 각 당의 조직기반은 지역으로 기울어 있었다.

복수정당체계는 사회적 직능집단의 이해를 대변할 다원정당체계였다. 이미 뚜렷해진 계층화 현상과 사회부문별 다원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양대 정당의 존립만 고집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교조, 노동자 농민단체, 여성단체, 그리고 재야의 복합적 정치조직 등 다양한 집단별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한, 기존 정당은 이들의 조직운동을 제도권으로 흡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3당합당이 아무리 설득력을 지니더라도 정당체계가 ‘거여야소’의 기형적 모습으로 변한 건 타협능력부족과 정치적 다원주의의 훈련 미숙에서 비롯한다. 복수정당 운영을 위한 준비가 미숙했다 하더라도 정치적 다원주의는 저지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 같은 흐름의 비중을 감안할 때 민자당의 합당 명분도 당연히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민자당은 당기(黨旗) 디자인과 로고를 바꾸고 95년 6.27지방선거 참패 후 신한국당으로 당명까지 바꾼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 나라 계파정치문화나 수장 중심의 파행적 정국운용이 바뀔 리 없었다. 민정계의 입지점을 대폭 줄이고 당 대표였던 김종필을 고사(枯死)시킨 다음의 일이었다. 1995년 6?27 지방선거와 1996년 4·11 15대 총선은 민자당의 정치위상을 크게 약화시켜 집권 여당의 이미지를 희석·후퇴시킨다. 그것은 곧 15대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표방하는 데 그치지만 이들 양대 선거는 앞선 분석결과들을 고스란히 반증하는 토대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민자당에서 용도 폐기된 김종필은 또다시 기사회생(起死回生),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한편 6·27 대승 이후 정치적 자신감을 확인한 김대중은 자신의 정계은퇴를 번복하고?민주당을 쪼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건하면서 지방선거와 총선정국을 이끈다. 이로써 1995-1996년 야권의 정치적 시간대는 마치 김영삼의 레임 덕을 기다리며 작곡된 ‘적들의 송가(頌歌)’가 교묘히 울려 퍼진 시기처럼 기록될 일이다.

여기서 김종필의 권토중래나 김대중의 정치적 식언(食言)은 대권을 향한 극단의 이해관계 앞에서 별다른 감화나 분노의 이미지를 동원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잘 흥분하거나 슬퍼하고 쉽사리 망각하는 정치문화를 초라하게 반영할 따름이다. 3김의 부활은 분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게 된 일상의 정치상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대 총선은 그간의 한국 정당정치 전반에 관한 총체적 비판이자 새로운 심판이었다. 전통 지배세력 일부의 와해와 해방 후 선거사상 최저 투표율(63.9%, 14대 71.9%), 신한국당의 과반수 의석점유 좌절, 여소야대의 부활 등이 대표적 단서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대 총선은 여느 선거처럼 철저한 지역주의와 인물중심주의의 골을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 점에서 강한 아쉬움을 반복 답습한다. 이 한계는?15대 총선 전,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이미?예고된 바 있다. 변함없는 ‘지역중심주의·파벌주의·인물중심주의’는 인치(人治)에 의한 정당의 사당화(私黨化)나 도당화(徒黨化) 경향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아울러 그 같은 폐단이 수장의 술수적 정치공학이나 경쟁정당의 합리적 선택 결과였음도 재론의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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