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40] 이부영·제정구·유인태 등 재야의 국회진출은 ‘돌풍 예고편’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유신 단행을 전후하여 민주화 운동의 맹아적 조직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재야운동세력은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 분화의 길로 접어든다. 이들의 적극적 운동 목표는 신군부의 계속적인 탄압과 광주민중항쟁 이후 두드러진 지배세력의 부도덕과 정치적 비윤리성에 대해 실천적으로 저항하는 일이었다.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한 재야운동단체들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재야의 민주화 욕구와 의지 표출은 적극적 공세로 전환한다. 둘째, 대부분의 운동단체는 각개격파를 배제, 협의체 방식을 빌려 힘의 연대와 전술적 합의를 도모해간다. 셋째, 이들은 70년대의 수직적 힘의 안배와 ‘지도-교육’의 조직운영방법을 부분적으로 유지하면서 조직과 단체들 간의 수평관계를 공고히 하기 시작한다. 넷째, 운동단체들은 자체 선전매체를 발행, 자기 노선과 이론을 선전해 간다. 다섯째, 노동자·농민 세력을 대변하고 이들을 진출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1970년대에 비해 커진다. 여섯째, 재야는 이른바 ‘순수재야’와 ‘현실재야’로 나뉜다. 순수재야란 현실제도권 외곽에서 기층민중과의 연대를 기반으로 진정한 민주화를 표방하고자 했던 운동세력을 말한다.

한편 현실재야는 반체제적 운동을 지탱하는 동시에 체제와 당면한 정세를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제도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고 그들과 대항·극복해 나갈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 세력을 말한다.

1970년대 이후 학계·종교계·학생운동계열이 전자의 범주에 속한다면 유신 이후 민주화대열에 앞장선 정치인 출신과 정치지망생들은 후자의 주류를 형성한다. 현실재야에 속한 대표단체들로 ‘민추협(民推協)’과 ‘민헌연(民憲硏)’ 등을 들 수 있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통합된 ‘민통련(民統聯)·민청련(民靑聯)·언협(言協)·민문협(民文協)·노협(勞協)’ 등은 전자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도권뿐 아니라 재야의 지도자적 위치를 장악할 만큼 충분한 지지와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1980년 4·7선언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국민과의 직접대화방식이나 재야와의 연대필요를 강조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이념정당의 출현을 꿈꾸기란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이다. 김대중이 김영삼 집단에 동참하길 거부하고 새로운 재야세력을 정치일선에 동원할 경우, 한국정치질서가 재편될 것이란 기대는 그다지 허황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신의 대선 입후보를 위해 재야를 활용했을 뿐, 결국 이념정당은 출현하지 않는다. 민추협을 기반으로 재야의 지지를 끌어 모으려던 김영삼 또한 당내의 계파분쟁을 잠재우진 못한다. 이는 그만큼 한국정치에서 이념정당의 출현이 어렵고 정당이 계파그룹화하고 만다는 독특한 내재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권을 통합하지 못하고 각자의 이익만 고려한 합리적 선택에 치중한 건 한국 계파정치의 치명적 모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은 문제는 이 땅에 이념정당의 출현을 성공시키지 못한 정치 문화적 한계다. 이념정당 출현에 대한 일반 유권자들의 거부를 제도정치권이나 재야정치세력 모두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재야는 이념정당에 강한 충동을 느끼면서도 이를 매우 부담스러워 했다. 우리의 정치풍토가 이념정당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않다고 하여 보수정당으로 탈바꿈할 수도 없다는 고민마저 그들은 떨치지 못한다.

신선하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재야는 1987년 대선에서의 정권교체 실패로 기존 제도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로 격하된다. 특히 ‘전민련’의 역할을 둘러싸고 1980년대 말부터 가시화된 노선갈등은 재야 파쟁을 격화시키고 ‘순수 재야의 길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 재야로 변신할 것인지’의 논쟁을 재점화한다. 요컨대 권력교체기에 재야는 ‘무엇을 할 것인지’ 그들 내부에서조차 계파의 대립과 논쟁구실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재야의 진보정당결성을 둘러싼 노선대립은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기존 야당들까지 포함해 범민주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논리(국민전선론)와 정당건설을 통해 민중진영의 독자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민중전선론) 싸움을 촉발시킨다. 이는 곧 김근태와 장기표의 입장 차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논쟁은 13대 총선과 대선 후 명분을 잃는다. 그들은 재야의 정치화와 상관없이 양대 선거 어디에서도 제도권의 세력 재편만 도모되는 현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 뼈저린 교훈을 14대 총선에서도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재야는 제도권의 세포분열을 그대로 답습해 일부는 정치권으로 진입하거나 순수재야로 남기도 하다가 1990년 강경대 사건을 계기로 ‘국민연합’이란 몸체를 드러낸 뒤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통합된다.

전국연합엔 ‘전민련·전교조·전농·전대협’ 등 실질적 대중동원능력을 가진 재야단체들이 모두 참여해 당면목표를 ‘민중주도의 민주대연합추진과 민주정부수립’에 두고 현실적 투쟁방안을 마련한다. 전국연합은 14대 대선을 향한 포석으로 반민자당 투쟁의 구체적 방안도 아울러 검토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한다. 한편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민중독자후보론’을 표방하면서 또 다른 도전의 세를 규합한다. 14대 총선에서 이부영·제정구·유인태 등 과거 재야 출신들이 제도권에 진입한 사례는 당시까지만 해도 제도권 내부의 한계와 모순을 풀 시금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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