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7일] 20세기 부패의 화신 수하르토 잠들다

2012년 이라크 소신 정치인 알-아자위 사망

2012년 1월27일 이라크 정치인 알-아자위(Hikmat Mizban Ibrahim al-Azzawi)가 79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노환과 지병인 암으로 감옥에서 병원으로 옮겨진 뒤 사망한 것이다.

이라크 전 부총리겸 재무장관 알 아자위(Hikmat Mizban Ibrahim al-Azzawi)가 지난 1996년 바그다드에서 AP와 인터뷰 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부의 부총리와 2번의 재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경제학자 출신인 그는 알-카림 콰심 대령의 이라크 정부 당시 저항하다가 1960년 체포된 이후 1968년 아랍사회주의자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에 입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이라크 중앙은행 총재에 올랐지만, 거액을 송금해 달라는 당시 대통령의 숙부 중 한명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1995년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그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한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 우다이 후세인(Uday Hussein)과 쿠사이 후세인(Qusay Hussein)의 거액 송금 요청을 거절, 1998년 다시 해임됐다.

1999년 다시 재무장관에 오른 뒤 부총리를 겸하게 된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 수배령이 떨어진 이라크 핵심 지도부 인사 55명 중 45위에 올랐다. 같은 해 4월19일 바그다드에서 이라크 경찰에 수배자 중 5번째로 체포돼 미군에 신병이 인도됐다.

2010년 日기자, 한국서 36년 만에 ‘간첩 혐의’ 벗다

2010년 1월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이규진)는 재심 법정에 선 다치가와 마사키에게 내란선동과 반공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면소를 각각 선고했다. 다치가와 마사키는 법정에서 “일본에 돌아가려면 혐의를 시인해야 했고, 재판은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런 발언이)터무니없어 보이지 않는다”면서 받아들였다.

이날 선고 36년 전인 1974년 당시 이 일본 기자는 한국 대학생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전달하고, “북한에서 무기가 들어올 것” 또는 “북한 방송을 청취해야 한다”며 선동을 한 죄목으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간 현대(닛칸 겐다이)> 소속의 다치가와 마사키(당시 65세)가 그 기자의 이름이다. 그의 간첩혐의는 한국의 정치인 유인태 전 국회의원과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유 전 의원은 당시 한국의 공안당국에 쫓기는 처지였는데,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한국 대학생들을 취재하러 온마사키 기자가 끼니도 잇기 어려운 유 전 의원에게 한국 돈 7500원을 건넨 게 화근이었다.

마사키는 1974년 4월 여관방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 서울대생 유 전 의원을 인터뷰했다. 유 전 의원은 “라면만 먹고 산다. 너무 힘들다”고 말했고, 마사키는 “불고기라도 사 먹으라”며 7500원을 건넸다. 이 돈이 나중에 북한의 공작금이 됐고, 마사키는 북한 지령을 받은 외국인 간첩으로 둔갑했다.

마사키는 10개월 만에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검찰이 주장하는 혐의를 인정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갔지만, 가족 등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됐다. 남편의 간첩 피소로 충격을 받은 아내는 정신병을 얻었고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마사키의 아버지가 억울함 속에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아내의 빈자리 때문에 세 살배기 아들은 물에 빠져 숨졌다. 한국판 매카시즘이 일본의 한 언론인의 인생을 완전히 짓밟은 것이다.


2008년 인도네시아의 전(前) 대통령 수하르토 사망

2008년 1월27일 인도네시아를 32년간 철권통치 했었던 수하르토 전(前) 대통령이 수도 자카르타의 페르타미나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

그는 심장과 신장, 폐 기능 이상에 따른 빈혈과 혈압저하 증상으로 연초부터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수하르토의 와병과 위중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네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그를 용서하자”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규정했던 수하르토는 199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카르타의 저택에서 은둔 생활을 해왔다.

병치레가 늘면서 그는 1996년 48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숨진 부인 고(故) 티엔 여사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오래전 유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하르토를 부패 혐의로 형사처벌할 계획이었던 인도네시아 검찰은 병세 악화를 이유로 2006년 5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으나 작년 7월 대통령 재직시 횡령한 자선단체기금 등 14억달러의 반환을 위해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검찰과 수하르토 가족은 그의 건강이 악화돼 위급 상황에 빠지자 지난 12일 민사소송 건에 대해 ‘법정 밖 화해’에 합의했다.


1973년 베트남 휴전협정 체결

1973년 1월27일 미국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그리고 베트남 남부 임시혁명정부 4자 사이에 휴전협정식이 열렸다. 나흘 전인 1월23일 북베트남 대표 스안 도이와 미국 대통령 보좌관 키신저가 가조인한 ‘파리협정’이 공식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파리평화협정은 ▲조인 후 60일 이내에 미군 철수 ▲포로 상호석방 ▲남베트남의 사이공정부 ▲남베트남 해방전선과 제3세력의 3자에 의한 민족화해일치 전국평의회 설치 등을 결정했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했다. 이로써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 휴전에 들어갔고, 보름 뒤 미군과 북베트남은 포로를 교환하고 미군의 철수가 시작됐다.

1965년부터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군도 8년 만에 맹호부대를 선두로 철수했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으로, 사망자가 120만여 명에 이르렀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투입한 전비는 1300억 달러였고, 사망 4만4000명, 중경상자 30만3000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북베트남은 파리협정 체결 2년 뒤인 1975년 4월 말 사이공을 점령, 베트남을 공산화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배경은 1954년 제네바 협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과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북으로 나뉘었다. 통합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에서 북베트남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남베트남의 총리 고 딘 디엠은 선거를 거부했다.

남북 간 군사 대립은 날로 심화됐고, 남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 게릴라 활동이 격화됐다. 미국은 베트남 공산화 저지를 위해 더욱더 깊숙이 개입한다. 전쟁이 끝없이 계속되자 리처드 M.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과 회담을 추진, 평화협정을 체결했고 미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전쟁은 다시 시작됐다.

1975년 남베트남이 무너지고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은 망명했다. 1976년 7월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통일됐고, 수도 사이공의 이름도 호치민시로 바뀌었다.

1945년 소련 적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1945년 1월27일 소련군은 잔악한 독일인들의 광기로 운영돼온 아우슈비츠(독일어로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강제수용소를 때려 부순다. 소련군이 폴란드 바르샤바로부터 약 300km, 크라쿠프 서쪽으로부터 약 70km 각각 떨어져 있던 수용소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700kg의 머리카락이었다. 또 사람의 뼈를 빻은 가루(骨紛),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의치와 안경태에 드리운 학살의 흔적과 함께 5kg으로 1000명을 살상할 수 있는 ‘사이클B’ 가스가 사용된 흔적도 발견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는 3개 수용소 중 이날 소련군이 해방시킨 수용소는 독일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곳이고 이보다 20배나 큰 인근의 비르게나우 수용소는 독일군의 파괴로 흔적만 남았다. 1940년 4월 아이히만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나치 친위대 SS의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폴란드·독일의 정치사범을 가두어 놓기 위해 처음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10만 명을 넘게 수용할 수 있는 막사와 4개의 가스실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건설된 아우슈비츠에서 1941년 9월부터 가스학살이 시작됐다. 이듬해인 1942년 1월부터는 이른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자행됐다. 1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떼죽음당한 곳이다. 전쟁이 끝난 1947년 전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처형된 150만 명 중 85%는 유럽 각지에서 끌려온 유대인이었다.

2012년 현재 아우슈비츠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불과 70년 전 독일의 미치광이들이 인간 150만 명을 개구리 죽이듯 학살한 만행을 되돌아본다면, 인류는 자신들이 쌓은 문명에 대해 유려한 문체로 찬사를 늘어놓기가 적이?면구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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