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43] 16년 전 대놓고 표변한 정치철새, 그들은 지금···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정치 철새들은 대놓고 표변(豹變)한다. 김대중 정권 출범 후 반년 남짓한 시기가 바로 그런 예다. 이는 차후 계파 이동과 이를 감지할 정치적 사전 암시로도 유의미하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장받고 또 무엇을 겨냥했던 걸까.
계파 변화가 당 수뇌부의 전략적 고려나 기획의 소산이라기보다 차라리 장본인 스스로의 치밀한 계산과 지나친 합리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탓해 봄’은 어떨까. 앞서 지적했듯, 여야 의석비율의 순차적 불균형은 물론이요 계파 수장의 품을 다시 파고드는 멤버들의 의중이란 것이 충성을 가장한 ‘자기 동원’ 즉, ‘위장된 자발성a disguised spontaneity’으로 가득했다면 이러한 가설적 사고의 틀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비록 공세에서 수세로 몰린 구여권의 모습이 당혹스럽긴 하였을망정, 그것이 곧 정치적 몰락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성분’과 ‘태생’은 달라도 긴박한 야수성이 입김을 드러낼 때,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이 주는 대중적 충격이란 어차피 ‘민정당’이 ‘민자당’으로 하루아침 탈바꿈하던 기억으로 상쇄해버릴 일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정치적 근력의 기본을 ‘한나라당’으로 바꾸는 동안, ‘DJP연합’을 궁리하고 있었던 것도 계파정치의 현장에서는 너무 ‘놀라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같은 현상이 가증스럽다거나 의석수의 강제 조율로 의회민주주의의 평균값이 낮아질지도 모를 것이란 우려 따윈 낭만적인 생각이다. 계파 앞에서 그건 ‘자기이익’ 다음다음의 주제였다. 중요한 건 권력교체기 한국의 계파 이동이 세기말에도 어김없고 직업정치인들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친여적으로 기운다는 점이다. 거대야당 한나라당이 창당(1997.11.22) 1년도 되지 않아(1998.9) 144석으로 줄어들고 대신 집권여당인 국민회의가 97석으로 늘어난 다음, 캐스팅보트를 쥔 자민련이 52석의 위용만으로도 한껏 몸값을 부풀릴 수 있었던 것도 고전 민주주의가 말하는 견제와 균형이었던 걸까.
‘한나라당 144석’ 대 ‘국민회의(97)+자민련(52)=149석’을 바탕으로 삼는 의회권력의 강제 균형이 어떤 일정과 정치공학 속에서 진행되었는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세기말의 흥분이란?덧없었다. 지난 세기를 돌아보는 회한보다 세월의 거대한 구비 하나가 자연 마감한다는 흥분과 천문학적 감동에 막연한 미래의 기대마저 걸어보려는 그런 형국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단순한 하루의 변화만으로도 세기가 바뀐다는(fin de sie?cle) 숫자상의 법석은?종교의 메시지가 숱하게 퍼부은 종말론적 이미지마저 겹쳐 유난스럽기 그지?없었다.
‘밀레니엄’을 보통명사처럼 사용하거나 ‘새천년(즈믄)’의 감격을 좀 더 오래 즐기려는 사회심리가 오죽하면 정당 개명까지 자극했는지를 보면 당대 상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권은 이미 장악했지만 독자의 힘으로 국회 과반을 넘기지 못하는 김대중의 답답한 의중이 별의별 계책을 채근했을 것이란 가설도 무리는 아닐 터다. 이 점은 자민련을 하는 수 없이 정치적 파트너로 이용하고자 했던 절박함과 또 다른 문제였다.
2000년 1월 20일, 급기야 집권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으로 창당하기까지 정치적으로 타들어가는 속내를 다스려야 했던 이는 야권에 따로 있었다. 이회창이었다. 정치가 ‘덕(德?Virtu)’과 ‘운(運?Fortuna)’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신통한 현상이라면, 그의 경우 후자의 힘은 약하게 작용한다. 세기가 바뀌고 다시 또 정치적으로 한 세대가 흐르도록 대권장악에 두 번씩이나 실패하지만 세기말까지만 해도 정치적 좌절을 만회할 기대와 흥분은 만만치 않던 ‘그’였다.
게다가 ‘그’에게만 대권의 여신이 손짓하리란 생각으로 당무에 충실하거나 야당생활을 희생적으로 봉직할 한나라당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 같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의식이란 ‘자기중심적’ 아니면 ‘예상이익 추구적’일 수밖에 없었다. 총재 이회창을 중심으로 한 당내 주류만 해도 ‘김덕룡?이부영?박관용?맹형규’ 등으로 나눠지고 있었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비주류들도 ‘김윤환?이한동?서청원?신상우’ 등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세력을 키워 나가려 애쓴 당내 관망파까지 합치자면 거대여당 ‘한나라’ 안에 자동 포섭되는 ‘동질’과 ‘균등’이란 턱없는 개념들이었다. 동상이몽과 실질적 딴 살림을 염두에 두자면 그건 이들 허망한 다수를 두고 이르는 말들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1)그가 총재이기에 하는 수 없이 잔류하는 편이 외관상 타당하다는 판단을 마친 부류 2)견제와 비판을 바탕으로 당내 주도권을 탈환하리라 다짐하는 세력, 그리고 3)그의 차갑고 비타협적인 성정(性情)이 싫거나 혹은 견딜 수 없어 급기야 당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그룹 등으로 세포분열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한층 옳을 것이다.
하나의 당이 여러 계파로 재생산되는 일을 개탄하지만은 말자.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으로 바라보되, 집단의 이동과 계파 ‘균열의 생화학(Biochemistry of Cleavage)’을 정질분석(Quality Analysis)함이 한층 중요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아울러 앞서 추적한 파쟁의 주역들이 차후 어떻게 변질?분열하는지 주목할 일이다.
총선이 대선과 동시에 치러지지 않고 정권의 중간평가성격을 지니면서 일정 시기에 권력 시스템 자체를 교란하는 이치도 흥미롭다. 김대중 정권의 일정 속에서 독특하기만 했던 15대 국회를 정리해야 할 의원들의 심경도 간단할 리 없었다. 재적의원 총수의 무려 26%가 신상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점은 무엇보다 주목할 일이다. 특히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신한 인사가 김영삼 정권 때보다 많다는 사실은 15대 국회의 치명적 결함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