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44] 새천년민주당서 더불어민주당까지 16년새 당명 변경 얼마?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옮겨도 두 번 이상 옮기는 등, 철새정치의 기염을 토하거나 ‘구속·사망·사퇴·재(보)선’ 등을 감수하며 15대 국회는 속절없는 사연들도 숱하게 남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당별 의원수의 증감과 막후의 정치적 함의 변화다. 앞서 지적한대로 국민회의는 영입을 계속하여 세기말 의석수가 79석에서 105석으로 급증하고 자민련은 DJP 단일화 후 43석에서 53석으로 늘어난다. 인위적 정계개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최다 의석을 자랑한 한나라당은 한때 165석까지 자랑하다 135석으로 줄어든다.

민주화의 이행과 심화에서 계파이동이 상수인지 아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유권자 본인의 정치의식과 환경차이에서 비롯된다기보다 당선자 본인의 정치윤리와 신념에서 기인하는 소양(素養)의 문제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성과 절제대상으로 이는 당연히 초극해야 할 유혹이자 함정이었다. 가치판단의 문제를 민주화 과정의 합리적 상수로 처리해버림은 그 자체로 이미 반민주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가족주의에 찌든 맹목의 문화는 계파주의를 늘 역사로 용서한다. 그것은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밴 체질로 확산·정착했고 문화의 상수로 화석화한다고 보는 게 관례다. 김대중 정권을 향한 기대과잉과 대통령 자신의 단호한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계파이동이 제대로 다잡아지지 않은 건 권력의 의지와 현실 간 괴리뿐 아니라 ‘의지’ 자체가 한낱 상징적 전시효과나 정치적 고해(告解)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반증한다.

김대중 자신이 아예 계보정치의 종말을 천명하거나 이에 따른 별도의 억압 메시지라도 표명하지 못했던 건 그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건 몰라도 계파 해체와 재생을 금압하거나 존재 자체를 백안시하려는 의지를 그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건 차라리 체면의 진솔한 지탱으로 이해할 일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변한 것이라곤 앞서 지적한 천문학적 연대전환과 이를 정당개명에 적용한 일 외에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그렇게 만든 당의 명칭이 돌고 돌아 도로 ‘민주당’이 되는 연유나 여기에 다시 계파이동이 거짓처럼 개입·확장하는 과정에도 분노하진 말자. 그들은 밀레니엄의 표피적 감동을 뒤로 한 채 2005년 당명을 민주당으로 변경한 다음, 2007년 6월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민주당’으로 다시 바꾼다. 게다가 2008년 2월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 통합민주당이 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다시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다음, 차후 새정치민주연합과 더불어민주당으로까지 변신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다.이 정당의 주요 강령은 국민통합의 정치와 실질 민주주의 실현,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루는 선진경제국가건설, 선진복지국가실현과 사회통합, 창의적이고 경쟁력 있는 교육·문화강국 건설, 상생과 번영의 남북화해협력과 평화체제구축, 환경보전체계 개선과 지속가능한 발전추구 등이다. 주요 정책비전은 변화와 쇄신을 통한 실질 민주주의 실현, 정책정당과 의회정치 활성화, 강한 중소·중견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 중산층 복원·강화를 통한 성장 잠재력 확충,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주거안정정책 추진, 사회 대타협 실현을 통한 공동체적 연대회복, 사회 취약계층 지원확대와 소득안정성 담보, 양성평등과 여성사회참여 보장확대, 지방분권시대 주민의 삶의 질 향상, 한반도 비핵화와 안보역량강화 등이다.

좀체 바뀌지 않는 이 나라 정치문화에도 건설적 변화의 조짐이 보인 건 그나마 다행이다. 김대중 정권에게 16대 국회는 따라서 체면의 기본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여전한 여소야대 판세 속에서도 집권 여당의 젊은 의원들이 보인 정치개혁의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변화의 모티브는 4·18 총선에 나타난 중진의원들의 대거 몰락으로 구체화된다. 극히 자연스럽게도 ‘그들’의 몰락은 계보의 해체와 정치기류의 재편을 자극한다.

한나라당의 김윤환계와 이기택계, 민주당의 김상현계가 각기 보스의 낙선으로 사라진 데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우는 초?재선들의 젊은 기운은 계파정치의 퇴조를 재촉하고 있었다. 막후 지시와 은밀한 통치구조의 폐쇄성이 주는 신비로움에 절을 대로 절어 있던 정당에 당내 민주화니, 계보해체니 하는 ‘주의?주장’은 역시 생소했지만 이 같은 기류가 집권여당뿐 아니라 한나라당의 젊은 의원들에게까지 확산된 건 고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파의 해체와 소멸이 정녕 기이했던 건 또 다른 아이러니로 남는다. 왜냐하면 이 같은 ‘개혁’ 메시지란 그 자체로 정치적 현시욕과 자기 업적의 가시화를 강하게 의식한 그야말로 또 다른 욕망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필요가 ‘관념’을 넘어 ‘현실’로 정착할 수만 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했으리라. 이 같은 순수한 생각을 부정할 까닭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곧이어 그들이 부딪친 벽은 의외로 높고 두터웠다. 계파의 한계는 그만큼 컸고 ‘순진(純眞)’의 페인트로 채색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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