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49]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헤쳐모인 그들, 15년전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호기(豪氣)’와 ‘노회(老獪)’의 충돌. 그것은 엄밀히 말해 경쟁도 대립도 아닌 정치적 자기현시 외에 다름 아니었다. 당 총재인 김대중은 국정개혁에 관한 구상을 정리해 밝히겠다며 당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소속의원 각자의 그간의 발언과 최고위원들의 의견은 모두 ‘애당·애국’의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고 밝힌다. 아울러 초·재선 서명파 의원들과 일부 최고위원들의 인적 쇄신건의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며 뜻을 충분히 헤아린 만큼 앞으로 적절히 판단해 처리하겠다고만 말하며 예봉을 비껴간다.

총재이자 대통령인 김대중은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가 당을 이끌어가는 지도역할을 하기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월1회 청와대 최고위원회의를 직접 주재하고 △당무회의 결의를 거쳐 협의기구인 최고위원회의를 ‘심의기구’화하는 등 최고위원들의 위상을 강화하며 △당과 정부, 청와대간 당정 협조가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민주당 사정은 복잡했다. 그것은 크게 세 방향으로 구체화되고 있던 힘의 분화와 그에 따른 당내 역학관계 변화와 맞물린다(물론 실제로는 더 복잡한 계파의 혼재와 그들 상호간 균열을 감안해야 했지만 이를 이끄는 힘의 변화축을 그나마 크게 잡아 본 결과로 말이다).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정치적 변화는 16대 대선을 앞두고 두드러지게 급부상한 ‘노무현’의 위상이다. 그가 그때까지 어떤 행적을 밟았고 대선 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는 여기서의 논의 범주를 벗어난다. 단지 남다른 야망과 투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풍운의 인물이었고 전례 없는 ‘국민경선제’로 민주당 최초의 대선 후보가 된다는 점은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이례적 사실들이다.

그 다음 변화는 이른바 정통그룹의 내부균열이다. 민주당의 법통을 잇고 한사코 DJ의 후임을 자처하는 소위 정통후예들의 정치적 이반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이다. 그건 이미 지적한 범동교동계 내부의 역학구도변화와 함께 포스트DJ의 정국을 바라보는 추종 세력들의 내부 동요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화갑·한광옥·권노갑’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의 기존 계보와 당내 새로운 권력단위로 굳어져가는 노무현을 견제하려는 잠정적 중도의 등장으로 ‘이들’의 존재를 상정할 일이다.

앞의 두 경우를 민주당내 기존 계보의 ‘분파’와 ‘재생’으로 본다면, 이제 다시 기억해야 할 세번째 현실은 외생 계파의 적극적 자기충전과 제도적 자기 반전(反轉)의 노력으로 볼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였다기보다 차라리 삭지 않는 정치적 욕망의 세포분열과 집착의 화석화(fossilization)로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대선’과 ‘이인제’의 관계는 적어도 한국 현대정치사의 배제하지 못할 ‘짐’으로 작동한다. 경우에 따라 그것은 능력에 크게 앞서는 의지의 소산으로 인식하거나 억누르지 못할 탐욕의 자기중심적 증폭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외형적으로 모사하고 충청권 지지를 항구적 기반인 양 오인한 잘못 외에도 이념과 소신의 벽을 쉽사리 넘나들며 오로지 대선후보로서의 입지 확보를 위해 애쓴 행적만큼은 계파정치의 네거티브 샘플로 길이 남을 일이다.

가뜩이나 복잡한 당내 계파의 분열상은 기왕의 DJ 추종세력 외에도 신생 계파인 친노 그룹과 그에 저항하는 세력들로 삼분되고 있었다. 이인제를 따르는 그룹이 반노(反盧)의 선봉에 서는 일이란 따라서 당시의 민주당 역학구도로는 조금도 이상할 리 없었다. ‘이들’ 말고도 새로운 엔트리로 이름을 올리고픈 정치적 욕망의 단위들이 합종연횡하는 현실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의 문제는 정체성의 동요와 지속적인 존립여부의 차원으로 숙성된다. 그것은 인맥의 난립으로 인한 극심한 경쟁과 양보나 타협 없는 주도권 쟁탈의 당연한 결과였다. 민주당의 혼돈과 분열은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당내 갈등이 분당과 해체 국면으로 접어드는 건 노무현 집권 이후였지만 애초의 이념기반과 그에 따른 민중적 지지기류는 16대 대선 직전에 이르러 재구성되기 이른다.

당대의 민주당 균열과 그에 즈음한 세력재편을 체계적으로 압축해본 것이 다음 <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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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와 반노 및 중립으로 갈라진 2002년 하반기 민주당 사정은 이처럼 ‘포스트 김대중’ 시대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과열양상을 보인다. 비록 신당추진기류가 본격화할망정, 이미 노무현을 대선후보로 확정한 민주당의 정치적 입장이란 것도 1)일단 노후보로 그냥 가자는 그룹과 2)노후보로는 ‘반드시 진다’는 그룹으로 양분되고 있었다. 전자의 그룹도 구체적으로는 확고한 노무현 지지세력(김원기·정대철 등)과 노 후보로는 어렵지만 법통을 확보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집단(김근태·정동영·조순형·유재건 등)으로 나뉘고 있었다.

노무현 후보로는 ‘어렵다’는 그룹은 다시 세 갈래로 나뉜다. 경선 직후부터 이인제를 따르는 계파 10여명은 일찌감치 반노파를 형성했고 중도개혁포럼에 바탕을 둔 주변 야당과의 합당추진파는 정몽준 의원의 신당 및 자민련?민국당 등과 합당을 통해 ‘반창(反昌) 연대’를 이루자는 입장이었다. 아예 노골적으로 신당추진을 부르짖는 탈당불사 그룹은 노 후보와 정(몽준)후보를 놓고 단일화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선을 서너 달 앞두고 불과 한 달 사이에 계파 이동과 그 속내의 충돌이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동기의 진중함이나 정치적 다중성의 의미를 단순히 변덕과 덧없는 표류행각으로 치부하는 건 물론 과잉 단순화의 오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경선제에서 패배한 정동영과 한화갑계에 몸담고 있던 문희상이 그 짧은 기간에 분명한 ‘친노’ 반열에 합류한 점이나 치열한 관망으로 중도파 주변을 맴돌던 인사들이 합당추진 아니면 신당창당을 위해 새로운 세를 이루려 애썼던 점은 주목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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