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52] 필리버스터 정국, 한국대표 ‘철새 국회의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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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6대 국회의원들의 당적변경 현실에 렌즈를 얹으면서 김대중 정권의 계파정치를 정리하기로 하자. 당명변경이나 창당을 포함, 당적을 옮긴 의원들의 명단과 그 이동지평을 구체적으로 뒤쫓아보자. 그들은 자기당 대표와 다른 당대표가 당세를 키우고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자고 막후에서 합당을 도모하려 들 때, 아니 그 같은 행위가 대의권 행사 주체인 유권자 모두와 한국정치사에 아로새겨진 교훈의 메시지 전부를 능멸하는 행위임을 알면서도 대부분 침묵하고 있었다. 야합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하며 그 여파가 자신들의 뒤통수를 부메랑처럼 후려칠 것이라는 사실조차 깨달으려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들의 면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소 번잡하고 방대한 다음 표는 16대 대선을 목전에 둔 2002년 10월말에 이르기까지 선수(選數) 고려하지 않고 누구든 적어도 한번 이상 당적을 옮긴 인물들의 집적자료(accumulated data)다. 이것만으로도 이 땅의 직업정치인들이 명분과 실리에서 얼마나 표리부동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젖어 있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야합의 대명사로 알려진 3당 합당은 물론 민중당 출신으로 신한국당에 입당한 인사, 무소속 당선한 후 특정정당에 입당한 인물, 공천과정에 여러 정당 눈치를 본 과거를 가진 사람, ‘의원임대사건’에 끼어든 의원들 모두를 아우르는 이 표는 앞서 예시한 것처럼 ‘철새형’의 경우, 고딕으로 굵게 처리한다. 특히 여야의 벽을 쉽사리 넘나들되, 극도의 자기중심성을 변절의 기본으로 삼는 사례에 주목한다.

개인별 당적 변동에 초점을 맞춘 이 리스트만으로 변절의 집단성을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이동은 철저한 명분이나 용기 있는 ‘개인’의 자발적 트레이드라기보다 지나친 분별과 기민한 계산 아래 철저한 합리성을 바탕에 두는 ‘집단적’ 판단 결과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홀로 옮겨 다니며 자신에게 들이닥칠 정치적 공세의 최대치를 감안하기보다 이기심의 표출과 그럴듯한 명분 조성에서 유사한 인물들끼리 같이 움직이는 게 훨씬 유리할 것이란 판단을 도모함은 이미 상식에 속했다.

그것은 곧 지체 없이 옮기거나 거침없이 빠져 나오려는 이들의 ‘뜻’을 마치 용기 있는 투사의 불가피한 고뇌나 결과인 양 포장하게끔 과장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했다.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거나 그 같은 상황의 유리함을 지탱하는 일만이 ‘가문의 영광’으로 직결되는 사고는 계파이동의 핑계와 방식을 치밀하게 고려하도록 유인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모양새를 집단화하도록 자연스레 자극한다. ‘외로움’의 ‘분산’과 ‘괴로움’의 ‘공유’ 쯤으로 그들의 정치적 처사를 심리분석하자면 그건 너무 지나친 일일까. 아울러 ‘머쓱함’의 정치적 해소와 승화 또한 염려해야 할 나머지 사안이었으리라.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그들의 일정한 물리적 ‘몰려다님cluster/gathering’ 에 깃든 파벌화의 본성일 것이다. 그것이 혼자만의 결행이 아니라 여럿이 단행하는 상당한 ‘무리수’라는 부담도 결국에는 상호위로의 핑계거리 밖에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부담이나 당사자들이 치러야만 하는 ‘불편함’이란 것도 언젠가는 되돌아올 정치적 자기 지분(持分)과 권력의 실질로 상쇄할 일이었다는 데 주목하고 보면 정치철새라는 세간의 혹평도 거뜬히 극복할 문제였다.

물리적 이동의 동기와 정치성을 추론하자면 그건 곧 ‘대세추종’과 ‘양지(陽地)지향’으로 볼 일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계파 구성원들이 버리지 못하는 ‘여당지향-강자추종’의 행적이 고착화하는 과정과 유형에도 눈길을 맞출 일이다. 그럴듯한 명분으로 계파의 집단적 이동이 급기야 ‘자기회귀’의 면모를 보이기까지 한 이른바 연어형 궤적의 대표격은 이완구의 경우보다 좀 더 앞선 다른 경우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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