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54] 노무현 정권의 계파정치 3가지 특징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노무현 정권의 계파정치가 지니는 특징은 다음 세 가지다.

대권장악까지 자신을 도운 측근세력기용을 통한 ‘보상’ 메커니즘의 운용이 우선이고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부터 구상한 신당 창당을 결행함으로써 자기 계파의 제도적 공고화를 꾀한 점이 그 다음이다. 아울러 그의 집권기 내내 무릅써야만 했던 국론분열과 민중부문의 동요를 ‘신당(집권 여당)’이 끝내 수습?완화하지 못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태생지였던 민주당과 다시 통합되고 마는 일련의 아이러니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집권-분열-복귀’로 이어지는 그의 계파정치는 곧 자신의 정치개혁 드라이브나 역사적 차별을 고집하려던 애초 의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로 도드라진다. 뿐만 아니라 그 역시 그토록 공박하던 보스통치의 모순과 계파관리의 한계를 거울처럼 되비침으로써 궁극적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답하지 못한다. 현실정치의 벽은 그처럼 높았다.

막연한 기다림이나 예기치 않은 행운의 출현으로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도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해방 후 최초로 겪어야 했던 대통령 탄핵의 상처까진 그만 두더라도 여과되지 않은 진보적 발상의 조기실현과 시민사회의 냉담한 균열은 ‘온 길’ 보다 ‘갈 길’이 얼마나 먼지 일깨우기 충분한 터였다. 이미 주지하는 정치일정들이지만 여기서 그의 집권기 전후에 나타난 크고 작은 변화의 이벤트들을 압축해보자.

보다 격상된 노무현의 정치적 존재양식을 대선 전부터 강하게 의식한 계파는 따로 있었다. 명계남?문성근 등 친 노무현계 인사가 주도하고 유시민을 대표로 하는 ‘개혁국민정당’ 멤버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직접개입은 유보되고 있었고 대신 새천년민주당은 노무현을, 한나라당은 이회창을 대선후보로 선출한다. 그런가 하면 1998년 9월 28일, ‘국민신당’은 총재와 소속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면서 기왕에 소멸한다. 게다가 2000년 1월 30일, ‘국민승리21’을 전신으로 하고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삼는 ‘민주노동당’이 창당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2002년 12월,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친다. 대선후보시절 부터 그다지도 자주 군불을 지피던 신당 창당은 그의 대통령 취임 이후로 미뤄진다. ‘새천년민주당’ 개혁세력과 ‘개혁국민정당’ 그리고 한나라당 탈당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2003년 11월 11일, 급기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2004년 4월 5일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과반의석(152석)을 확보하는 등 기염을 토하지만 국정운영실패와 당내 분열로 소속의원들이 잇달아 탈퇴함으로써 2007년 6월에는 73석으로 줄어든다.

‘새천년민주당’은 2005년 5월 6일, ‘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 다음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출범했다가 같은 해 8월 13일 다시 ‘민주당’으로 환원한다. 2007년 8월 5일, ‘열린우리당’과 ‘중도통합민주당’의 탈당세력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탈당(2007.3.19)한 손학규가 주도하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고 같은 달 18일 ‘열린우리당’과 합당함으로써 결국 열린우리당마저 소멸한다. 그런가 하면, 2004년 ‘자유민주연합’이 총선에서 참패하자 탈당세력은 ‘국민중심당’을 창당하는 한편, 잔류세력은 ‘한나라당’에 흡수됨으로써 ‘자유민주연합’도 사라진다. 2007년 10월 30일, 17대 대선에 출마한 문국현을 중심으로 ‘창조한국당’도 창당된다.

결과적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세기의 전환기를 겪는 한 세대마저 민주당의 운명과 정치유전은 혹독했다는 점이다. 대선후보를 둘씩이나 내놓고 끝내 대권장악마저 지켜보는 광영의 기회를 겹으로 누렸음에도 또 다시 야당으로 변모하는 당의 현실이란 극도의 아이러니였다. 아울러 새삼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당대 정치연구의 기본으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창당의 함수관계다.

노무현과 그의 추종세력은 도무지 ‘열린우리당’을 왜 만들었던 걸까. 이제 그마저 사라진 현재, 이에 관한 진솔한 답은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노무현 개인의 정치적 판단과 전략적 추진결과였는지, 아니면 그를 따르고 옹립하려 했던 ‘세력들’의 ‘집단적 사고(group think)’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현 단계 추론으로는 이 같은 두 가지 상상과 분석으로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추론의 한계값을 깨자면 다음과 같은 가정도 가능하리라. 노무현의 정치력은 비록 민주당에서 배양하였으되, 1)대권장악과 그 효율적 운용을 위해서는 개혁의 ‘순혈(純血)주의’가 요긴하더라는 자기변명과 2)그만큼 당의 적통(嫡統)을 자처하는 전통세력과 DJ의 ‘존재’ 자체는 정치적 부담을 넘어서는 심리적 장해와 일상의 적(敵)과 동지의 관계를 벗어나는 미묘한 (혹은 치명적인) ‘거북살’로 진작부터 비쳐지기 시작했다는 상상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용서와 관용의 역사적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 같은 생각의 일단이 ‘분당’도 ‘독립’도 아닌 ‘창당’의 결정적 변명논거가 된다는 이치도 분명치 않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이유는 그래서 마치 진실과 사실의 격차만큼이나 생소하게 후대의 소란스런 주제로 자리 잡는다. 시끄러워도 소란의 진원은 찾을 길 없고 모두가 ‘안다’며 ‘그렇다’고 변명해대도 그게 결코 전부일 수는 없는 ‘참여정부’의 계파정치. 그다지도 아련함 물씬거리는 논쟁의 주역들과 함께 이제는 기억의 늪에 가라앉은 ‘당’. ‘당’은 엄연히 다 같은 ‘당’이었으되, 여느 당이 아닌 듯 포장하려다 소박함도 진지함도 잃어버린 채 증발해 버린 ‘당’이 바로 그들 집단이었다. ‘열려있다’고 자랑했으나 뜻이 다른 이들에겐 애초부터 닫혀 있었고 가없는 이 땅 위에 모두가 한편이라며 동원과 참여의 메뉴를 마련했지만 그들이 되뇌려던 ‘우리’는 허구의 부피로 넘쳐나고 있었다.

얼핏 새로운 듯 보인 ‘열린우리당’은 결국 노무현 계파의 잠정적 집결지였다. 그리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임의 임시수장이었다. 열렬한 지지자들의 자발적 결사체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앞의 그는 영원한 노짱이었지만 이제 더 예전의 ‘그’를 찾을 순 없었다. 전두환에게 자기 명패를 내던지며 5공청문회에서 사자후를 토하거나 삼당합당을 야합으로 몰며 민자당 결성을 뒤로 한 채 ‘꼬마민주당’을 지키던 노무현은 사라지고 없었다.

엄존하는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되어 이내 그 당을 뛰쳐나와 새로운 당을 만드는 일련의 작업을 전후하여 그는 어떤 그럴듯한 명분도 명쾌한 설명도 무릅쓰지 못한다. 대신 과거 여당은 물론, 김대중 정권과도 확연히 다르며 ‘참여정부’의 새로운 역정을 드러내려 몸부림치는 의지와 열정의 과잉으로 자신을 분식(扮飾)하기 급급해 한다. 적어도 그 같은 정치적 행각이 흉보다 닮아가는 엄마 ‘게’의 모습이나 민주당 본체로부터 말리지 못할 ‘미운 오리새끼’의 꼬리표를 감내하는 일로 굳어졌다 한들, 예전 여당이 다시 한 번 야당이 되고 같은 편이 적진으로 떠나며 흩어지는 일은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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