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53] DJ시절 ‘의원임대 사건’과 노무현의 편가르기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2001년 1월 발생한 ‘의원임대’의 건이 바로 그 원조격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배기선·송석찬·송영진’ 등이 민주당을 탈당하면서 자민련에 입당한 이 사건은 당시 송석찬이 “공동정권의 회복을 위해 정치생명을 걸고 죽음을 선택했다”며 비장한 의중을 비치자 세상의 관심을 끈다. 이는 곧 자민련을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 한나라당을 새롭게 견제하려 한 국민회의의 전략이었다. 이 같은 ‘임대’에 불만을 품고 강창희가 반발 탈당하자 심지어 장재식을 2차로 자민련에 방출하는 희대의 사건을 연출하는 일도 집권여당은 마다하지 않는다.
더욱 압권인 것은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긴 송석찬이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을 촉구하며 DJ에게 보낸 서한이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인구에 회자될 ‘연어(?魚)’론을 펼친다. “대통령님과 민주당을 떠나 자민련 입당을 결심한 순간부터 한 마리 연어가 되기로 결심했다. 태어난 고향을 떠나 성숙한 뒤 일생일대의 성업을 위해 강을 거슬러 마지막까지 힘을 쏟아 알을 낳은 뒤 생을 마감하는 연어가 되어 다시 돌아오겠다”는 그의 진정성은 어디까지 용서 가능한 걸까. 게다가 그 동기의 갸륵함은 어디까지 확장 가능할까.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든 변절의 명분과 탈색의 정치적 핑계를 마련할 수 있도록 허여된 공간. 중요한 것은 ‘실리’요, ‘모양’과 ‘형식’ 혹은 ‘절차’란 부차적 의미만 지닌다는 사고마저 얼마든 묵인되는 나라. 당적의 개인적 변경이나 집단이탈은 물론 당명 자체의 희화적 개명 앞에 누구하나 반기를 휘두르지 못하는 정치집단. 그리고 이들 모두를 감싸는 문화적 보수와 그에 찌든 정당들의 상호각축.
‘전근대’와 ‘현대’가 야합하고 유교적 충절과 ‘중세’의 침묵을 매개하는 인습의 정치지평이 유권자의 손에 의해서만 분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분명 아이러니다. 밀레니엄의 요란한 폭죽과 그에 뒤따른 시대의 흥분이 채 두 해도 넘기지 못하고 퇴행의 나락으로 변질하는 정치비극의 반복 역시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사고의 원시성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터다. ‘계파’의 생리와 체질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되레 그 촘촘한 회로와 비밀의 방에 스스로 갇혀버린 정권. 그것이 곧 ‘국민의 정부’가 넘지 못한 장벽이자 21세기 정치철새들의 업보였다.
‘야당의 여당화와 여당의 야당화’-노무현 정권의 파벌정치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과 그가 일군 ‘참여정부’의 공과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른바 ‘진보’와 ‘개혁’을 앞세워 세상의 온갖 구태를 뒤집어엎겠다는 발상의 혁명성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취임은 상식과 인습의 틀을 깨는 계기로 새겨진다. 그것은 학력과 가문, 배경과 출신성분 등을 물을 필요 없이 이제 평범한 인물도 정치적 등극이 가능해졌고 누구라도 권력이 누려온 기득권을 매만지거나 일체의 특권을 뒤흔들 수 있음을 웅변처럼 토하는 일이었다.
될 성 싶지 않았던 인물의 정상정복과 그에 따른 기성의 시선이 갈라지는 변화는 가히 요동이었다. 그것이 하필 ‘흠모’와 ‘미움’이란 양 극점 사이에서 세상을 뒤흔든 저간의 사정도 ‘경험칙(經驗則)’조차 세울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늘 시끄럽고 소란한 쟁론 한 가운데 서있었다. 그의 느닷없는 출현으로 이제까지의 입지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부류와 이참에 옛 것은 갈아치우고 새 것이 정의의 푯대가 되는 세상을 만들자며 소탈한 권력의 압도적 전진배치를 외치는 무리가 대립하는 일도 막아내긴 역부족이었다.
겪지 않았던 일들을 겪어야 하는 이들이 ‘수구’와 ‘꼴통’의 이음동어를 견뎌내야 했던 5년의 세월도 전대미문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영영 기득권을 되찾지 못할는지도 모르리란 부정적 예감과 이를 근본적으로 비웃는 이들의 엄연함마저 감안하자면 ‘반노’와 ‘친노’의 세 대결이 또 하나의 분단의식을 채근해 댄 것도 당연했다.
누군가는 해방공간 조선의 좌우격돌로 빗댔고 진보와 개혁의 순기능마저 사회주의의 적색논리로 극한 공격하는 첨예한 대척점들이 세상 곳곳에 똬리를 튼 것도 지우지 못할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민중의 입맛에 권력이 미리 함몰되는 ‘포퓰리즘’이 망령처럼 떠돈다며 애써 순화(馴化)된 어법을 사용하기도 한 게 세기 초 사회지평이다. 새로 출범한 권력은 하지만 이 같은 변화가 바람직한 민주화의 시동이며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표방한다. 일체의 특권도, 기성의 권위도 결국은 무너져야 할 악습이자 폐단이란 사고가 풍선처럼 팽창해간 것도 한 때 5공의 노태우가 내건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에코로 작동한다.
노무현이 강조하는 특권타파란 온갖 기득권의 재고와 철폐를 의미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치질서의 오늘을 잉태한 과거의 역사도 예외는 아니란 사실 역시 충분히 암시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무오류와 모순의 ‘절대부재’를 반증하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역설적으로 기득권 철폐를 위한 그의 정치적 웅변은 자신의 몸에도 이미 밴 과거의 정당문화와 그 폐단을 가리고자 애썼던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속’에서 컸기에 ‘거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선 ‘힘’과 ‘때’가 필요하다는 사실마저 절감했던 그는 대통령의 권력이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임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노무현 개인의 정치적 분노와 평소의 개인적 불만 때문이었는지 여부는 애매한 채로 남는다. 그건 그의 죽음의 방식이 지니는 예외성뿐만 아니라 좀체 만족하지 못하는 성정의 소산으로도 충분히 추론할 일이다. 생전에 그가 지닌 독특한 비감(悲感)과 격정으로 미루어 계파의 완전해소와 그 종말에 자신의 정치적 방점을 힘주어 찍던 일이야 지나친 순수의 표출 아니면 이상향의 갈구로 치부할 터다.
나아가 극한의 자탄이나 이를 단숨에 해소하고자 애쓰던 초극심리의 발로로도 볼 일이다. 하지만 계파의 완전해체나 이를 계도하고자 발군의 노력을 기울이는 민중계몽 정치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각의 정치란 강요대상일 수도 없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할 ‘주체’에게 정치적 모럴리티의 무한한 보강과 자기극복의 긴장어린 과제를 반복 주입하는 일 만큼이나 그 과업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묻자. 노무현 시대에 이르자 ‘계파’는 과연 사라졌는가. 게다가 기존의 세상을 후려치며 홀로 토해내던 그의 레토릭은 변화의 실질을 도모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현대사 초유의 선동적 리더십이 세상의 정치적 균열(cleavages)과 강도 높은 사회적 대립 골을 한층 구조화하면서 앞서 밝힌 DJ정권의 부정적 유습을 은폐 ? 잠식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점은 그러나 쉽게 잊혀진다. 포퓰리즘 정권의 요란함에 가려진 눅눅한 과거의 폐단과 지우지 못할 모순의 역사적 존치. 그리고 자기한계의 무한복제.
정권의 열렬한 담지자들과 한결같이 그를 환호한 무리들이 싸움의 견고한 반대논리를 바닥에 깐다 한들, 노무현 정권의 계파정치는 엄연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자기 계파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고 자기만의 ‘사람들’ 없이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당인(黨人)’이었다. 그리고 제 계파의 수장이었다. ‘계파로 계파를 공략하는’ 일이 무슨 대단한 개혁의 빌미가 됐을는지는 몰라도 기민한 정치적 선전논리만으로 계보소멸과 해체를 광범위하게 주입하려 ‘듦’은 기실 넌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