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50] ‘친노 vs 반노’ 사이 갈등, 2002년 ‘싹 돋아’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6대 대선을 앞두고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친노와 반노의 대결도 눈여겨 볼 대목이지만 중도를 견지하려는 세력들의 당내 스펙트럼이 어떻게 변하는지 따져보는 일도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앞의 두 표에 적시된 인사들을 나란히 견주어 보아야 할 까닭도 여기 있다. 이를 지켜보는 민주당 수뇌부, 특히 DJ의 심경은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정동영을 비롯한 당내 소장파의 일격에 불편했던 가신(家臣)들마저 끌어안아야 할 총재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평생을 따라 다니며 오로지 대권의 꿈을 성사시키기 위해 권모술수를 아끼지 않던 ‘그들’의 쾌적한 말년을 보장해주기 보다 젊은 세력에게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처지를 바라보는 일이란 답답함의 경지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이란 다크호스와 그 홀연한 자기숙성과정을 감수해야 함은 동교동계로서 ‘하는 수 없는’ 정치적 불편함이었다. 이미 상당부분 내부균열을 인정, 당의 정체성 혼돈을 절감한 수뇌부로서도 ‘친노’와 ‘반노’의 대결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손쓸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친노’는 바야흐로 DJ의 적통을 잇는 실질적 후예로 기정화하거나 스스로 윤색하기 시작했고, ‘반노’는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가 대안임을 내세우려 몸부림친다.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태세로 첨예한 두 진영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도’는 차라리 애처로웠다. ‘반노’가 이미 대선후보로 확정된 노무현 개인을 미워하거나 극한 견제할 즈음, ‘친노’는 자신들의 도전이 DJ의 폐부를 향한 칼끝의 ‘곧추세움’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거듭남이자 당의 창조적 파괴임을 자부한다. 그 앞에서 아무런 견제조차 못할 당의 장식품으로 동교동계는 옛 가락으로 변해버린 자기네 처지를 재확인할 따름이었다. 누가 이길 지만 바라보다 그들을 향한 최종의 지지를 예비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DJ의 복심을 누구보다 잘 읽는다는 ‘늙은 그들’이었다.
엄밀히 말해 대선의 최종승리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의 정치기류가 어디로 흐를지 예측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총재 역시 양분된 판세 향방을 막후 조종하긴 어려웠고 아무리 뛰어난 수완의 소유자인들 누구에게 기대어 어디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지 가늠하기도 난망한 일이었다. 현실정치를 ‘명분’과 ‘운세’의 기막힌 조합으로 인식하는 기민한 단위들로서는 그저 최소한의 의리와 자신이 챙길 이익의 최대값이 조화를 이루는 모종의 지점에서 행운이 다가오길 도박꾼처럼 기다릴 뿐이었다.
노무현을 당 대선후보로 뽑아놓고도 때 아닌 신당창당과 이를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된 건 곧 그에게 당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세력과 이에 맞서겠다는 측의 갈등 때문이었다. 민주당 내부알력과 인맥의 난립으로 인한 모순은 타협과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일찌감치 어렵게 했고 사사건건 대립과 파행의 연속으로 상황을 이끈다. 신당을 구성하더라도 ‘친노’는 자민련이나 민국당과는 힘을 나누지 않을 것이며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는 압도적 주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반노’는 반이회창 세력이 총집결하는 통합신당으로 가야하며 당내 보수와 진보가 힘을 합치되 노무현은 후보로도, 추진주체로도 나서선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중도세력은 여전히 이들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입지를 최대화하려는 기묘한 통합문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도발과 저항 없이 기존의 노후세력들과는 자신의 미래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한 정동영. 어느덧 훌쩍 커버려 자신을 키워준 집과 부모마저 부담스럽게 된 노무현. 이번에야말로 놓칠 수 없는 대권 앞에서 무의식마저 전율하는 이인제. 어떻게든 당을 추슬러야겠건만 어디서도 변혁의 가늠자를 찾지 못해 절치부심하는 동교동계와 DJ. 그들 각자의 난망함과 치열한 이익의 대차대조가 난립·충돌하는 2002년 늦여름도 쉽사리 그 열기를 접지 못한다.
계파의 생성과 분열과정은 언뜻 복잡해 보이나 노무현 계보의 등장은 단순한 속내를 골자로 삼는다. 그 역시 ‘홀로서기’ 위하여 건설적 배반과 창조적 변절을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정치명분의 바탕이 된다. 노무현이든 정동영이든 대통령을 향한 후보 ‘자리’가 오를 수 있는 최고위치가 아닌 한, 꿈의 반납이나 욕망의 자제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당내 기득권을 분쇄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범동교동계뿐 아니라 (김영삼·김대중의 꿈의 실현 이후) 상도동계까지 포함하는 광역파벌의 해체를 겨냥한 만큼 3김 시대의 유증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권력교체기의 함정을 피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계파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기기 위하여 만드는 핑계가 이제껏 쌓아 온 실덕과 과오의 ‘가림막’은 될 수 없었다. 자신만큼은 장차 한국의 ‘계보정치’가 끝난 개념임을 힘주어 말하려 했지만 그 역시 ‘파벌’의 도움 없이 대권을 쟁취하기란 힘겨웠다. 정동영이 시동을 걸고 노무현이 동승한 동교동계 ‘때리기’와 구 파벌 ‘해체’란 초유의 과업은 국민경선제라는 이벤트를 낳았고 당내 혁명을 의식하지 않고는 애당초 성공하기 힘든 컨셉이었다. 자기가 ‘크기’ 위하여 자기보다 ‘큰’ 존재를 밟는 행위는 적어도 현실정치의 장에서 역설로 용납되는 이례적 일탈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음’은 대권을 바라보는 장본인이나 그를 좇는 동업자들이나 한결같이 지켜야 할 이 나라 직업정치현장의 최고덕목이다. 정치적 ‘생존’이 일상의 ‘생활’에 앞서는 고도의 철학적 준칙임을 망각할 때, 최고권좌의 황홀함이나 이를 통한 철저한 마비의 메커니즘은 학습하기 어렵다. 선배를 죽이고 막후를 부정하는 피의 저항이 단행되지 않는 한, 나의 극적인 승리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는 것부터가 그래서 중요하다.
DJ의 퇴임이 곧 JP의 등장으로 연결될 리 없는 상황이야말로 민주화의 역설적 결과였을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권을 거머잡는 걸 본 김종필로서야 일이 그릇된다 한들 스스로 삭힐 대권이었겠으되, 민주당 인사들이야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권력’이요, 남 주기 싫은 ‘공직’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를 당내 경쟁계파에게 넘겨주기 싫은 마음이야 누구라도 엿볼 본색차원을 넘어서고 있었던 터다. 그걸 정치본능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참을 수 없는 탐욕의 한계로 묘사하든 대권 앞에 좌절해본 인사보다 더욱 눈여겨 볼 대상이란 가열 찬 욕망으로 질주하는 뉴 페이스들의 면면이었을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대선을 불과 석 달 여 남겨 놓고도 내부 분란을 잠재우지 못한 민주당은 112명 의원 대부분이 두 파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었다. ‘반노’ 그룹은 ‘친노’를 운동권으로 몰며 입지를 넓히려 애썼고 ‘친노’는 ‘반노’가 과거의 안온했던 시절을 잊지 못하면서 집권만을 위해 당의 정체성까지 훼손시킨다며 맹공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집권여당의 프리미엄과 각종 이익의 향배를 낙관하고 있던 민주당 인사들의 정치적 선택이란 결국 이기적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입으로야 국가와 민족, 통일과 복지 아니면 평등과 번영을 찾았지만 감각의 촉수는 그들 역시 재집권의 영광이 자신에게 기여할 몫의 ‘실질’을 구(求)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