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48] 국민의당 합류 박지원의 과거 계보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DJ 측근그룹은 이른바 범동교동계로 알려져 있다. 성분과 뿌리가 각기 다르고 분화의 지평과 세(勢)의 재생산 방식이 달랐던 까닭도 따지고 보면 크고 작은 모멘텀이 개재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호남의 뿌리를 존중하며 김대중을 섬기되, 정치적 속내는 기실 달랐던 터였다. 가능한 한 따로 크고 각기 동원 가능한 가신(家臣) 그룹 내 자파 세력을 별도 관리함으로써 결정적 기회가 오면 정치적 생장력을 펼치리란 판단은 야망치곤 차라리 그들 내부 생리에서 볼 때 솔직한 속내였다.

지근거리의 보좌는 이미 하지 않는 듯 보이는 권노갑을 범동교동계 구파 수장으로 간주하는 데 이의가 없었던 반면, 한화갑은 그와의 대척점에서 또 다른 계파를 이끄는 신파 우두머리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세력 ‘추(錘)’ 사이에서 한광옥과 중도파가 기민한 사주(四周) 경계와 힘의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가운데 16대 민주당 초·재선그룹의 판세 뒤집기 전략은 강구되고 있었다. 이처럼 다소 복잡한 민주당내 범 동교동계의 위상을 압축해 본 게 여기 있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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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측근의 인적 쇄신을 최대 명분으로 삼는 정동영의 공격은 곧 정치적 모순의 늪에 빠진다. 이는 개인의 철저한 이론무장과 원내비판을 토대로 당 중앙을 향한 준엄한 경고형식으로 마무리 짓거나 그에 따른 추후의 공포효과를 당내 저변으로 확산시켰어야 할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정치는 ‘세(勢)’의 부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이 같은 정당성을 변명하기 위해 자신의 ‘세’가 필요했다.

혼자서는 넘지 못할 권력의 강고한 벽과 이를 어쩌지 못하는 정당문화는 그렇다 칠 일이었을 터다. 순수한 속내로만 말하자면야 기왕의 당내 계파에까지 기댈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세력의 확장을 통한 정치적 도덕률의 파급이란 ‘차가운 불’ 아니면 ‘뜨거운 얼음’처럼 양립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순수성은 지탱하되, 효과는 극대화하고 오해와 비난은 최소화하자는 의도도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성명을 내고 서명 작업까지 추동한 그들로선 초·재선의원들이 범 동교동계의 신파 리더 한화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일 역시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일부에선 심지어 정동영의 막후에 한화갑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실제 팽배한다)

형식은 서명을 통했으나 대통령을 직접 압박하며 인적 쇄신의 한계를 몰아 부치는 정동영의 행보에 청와대도, 구파도 강한 부담을 느낀다. 특히 권노갑의 반감은 정치적 발칙함을 넘어서는 모멸과 본격적 자기방어단계로 접어든다. 이미 직업정치현장을 떠나 있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계파정치의 어제와 오늘을 거머쥔 장본인인 양 간주되는 건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현장의 중심에서 힘의 동심원을 동시에 밟고 있던 서명파와 민주당 초·재선그룹은 그러나 이를 무슨 항명파동이나 하극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대신 내부의 이견과 정치적 균열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명분 찾기’에 분주해진다. 그리고 내친 김에 이미 넘어버린 용인(容忍)의 한계를 기정화하기 위해 스스로 애쓴다. 너무 멀리 와 버린 정치행보 뿐 아니라 또 하나의 튀는 집단으로 ‘그들’ 자신이 세상에 각인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돌아가긴 힘겨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부의 견해가 조절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정동영을 브랜드로 삼는 독자 계파가 숙성되긴 아직 이르다는 걸 반증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들의 개혁논리를 계속 세력화시키며 지탱할 것인지, 아니면 뜻만 이룩되면 해산하거나 세력화 논의자체를 거부할 것인지를 둘러싼 합의가 쉽게 도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때 이들은 다시 단합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서명운동에 동조한 초선 의원들이 재선 의원들과의 분열을 정리하고 모두 한 길을 가기로 입장을 정리한 데 따른 잠정적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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