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명정책연구원 장기표 원장 “자존심 상케한 후배 덕택에 25년째 금연”
“실현가능하고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일에 여생을”
“민노총, 급여인상 자제하고 사회 바로잡는데 관심을”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은 노동자 평균임금 정도 받아야”
“행안장관 경찰청장, 이태원사건 정치적 책임지고 사퇴를”
아래 인터뷰는 <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인터뷰를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재구성한 것으로 지난 15일자에 이어 이어지는 글입니다. <편집자>
-고향은 어디인가.
“경남 밀양군(현 밀양시)의 종남산과 덕대산 중간의 산중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김해군(현 김해시) 한림면으로 이사를 왔다. 밀양에서 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내가 4남2녀 중 막내인데, 아버지가 삼촌들과 형제들을 결혼시키면서 땅을 1∼2마지기씩 떼어서 주다 보니 살림이 쪼그라들었다. 우리 집은 한림면에서 아주 작은 방앗간을 운영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근본적으로 농민이다. 다만, 마을 청년들 다섯명 정도를 사랑방에 불러 놓고 천자문, 소학 같은 것을 가르치셨다. 권위주의적이고 괄괄한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빈농이었다.”
–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었나.
“49세에 나를 낳으셨다. 자기 이름도 못 썼지만 총명하신 분이었다. 사친가, 회심곡 같은 아주 긴 가사를 모두 외웠다. 인내심이 강하고 여성스럽고, 지혜로운 분이었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을 때 막내아들 얼굴 한번 봐야겠다면서 추운 겨울에 형수님과 함께 면회를 오셨다. 당시에는 KTX도 없었기에 열차로 8시간 정도 걸렸다. 나이 든 분들은 소변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디셨는지 생각하면 지금도 말이 안 나온다. 어머니는 다음 해인 1978년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 80세였다. 당시 나는 대구교도소에 있었다.”
– 소시적 학교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나.
“형제 6남매 중 학교에 다닌 사람은 나밖에 없다. 형들과 누나는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작은 방앗간은 형과 형수가 운영했는데, 내가 원동기를 담당했다. 그래서 학교를 마치면 바로 방앗간에서 일해야 했다. 진영읍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읍내 한얼고에 다니다가 마산공고로 전학 갔다. 한얼고에 있으면 대학 가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고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입주 과외를 했다.”
– 형 중 한 명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에 근무했다는데…
“셋째 형이 기억력이 좋았고 한문공부를 많이 했다. 군대에 가서는 글씨를 잘 쓰고, 차트도 잘 만들었다. 그 덕분에 육군본부를 거쳐 중앙정보부 직원이 됐다. 중앙정보부가 대통령한테 보내는 문건을 형이 썼다고 한다. 형은 나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 사표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른다. 형은 중앙정보부 부산지부에 근무할 때 신민당사 점거 농성사건으로 서울 중앙정보부에 잡혀있던 나를 인계받은 적이 있는데, ‘몸 괜찮나’라고만 물었지, 그런 일은 앞으로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 서울대 법대는 재수해서 들어갔는데.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려면 독일어 또는 불어 시험을 치러야 했다. 마산공고에는 그런 과목이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독일어학원에 다녔다. 그 바람에 다른 과목 공부를 제대로 못 해 입학에 실패했다. 동국대 법학과에 들어갔다가 재수해서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 마산공고 시절 공부를 잘했나.
“상위권 수준이었다. 수학을 잘했다. 기하(수학) 선생님이 내가 수학을 잘한다는 이유로 서울대 화공학과 진학을 권했었다.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고등학생들의 수학참고서인 ‘수학의 정석’ 문제를 풀곤 했다. 이 참고서의 문제 하나하나가 재미있었다.”
– 대학교 1학년 때 갑자기 군대는 왜 갔나.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맞았다.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라면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울대 법대생 중 군대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빠졌다. 최전방에 배치됐고 복무기간이 34개월이었다.”
– 베트남전에는 왜 참전했나.
“자원한 것이 아니라 차출됐다. 돈을 써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월남전 참전 자체에는 반대한 사람이었다.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가가 한번 결정하면 따라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포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기에 베트콩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일은 없었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고엽제 피해는 심각한 경우 장기파손 등이 오는데, 나는 피부병 정도에 그쳤다. 온몸이 가려웠기에 교도소에서 ‘1만일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하루에 0.01%씩 1만일 간 땀을 흘려서 고엽제 독소를 빼내자는 것이었다. 교도소에서 30분간의 운동시간이 되면 달리기를 해서 땀을 냈다.”
– 군대생활은 어떠했나.
“모범 군인이었다. 병장들은 말년에 훈련을 빠지는 게 일반적인데, 유격훈련, 혹한기훈련을 모두 참여했다. 월남 파병 1년 후 돌아왔더니 부관이 후방으로 빼준다고 했는데 거절했다. 중앙정보부 춘천 분실장은 자기 조직에서 근무하라고 권했으나 남은 군대생활 8개월을 부대원들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 나는 부대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군생활을 했다.”
– 취미는 무엇인가.
“바둑을 좋아한다. 요즘은 바둑을 안 두겠다고 작심했다. 시간을 많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바둑 두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바둑을 천천히 두기 때문이다.”
– 담배와 술은 어느 정도 하나.
“밤새워 회의할 때는 하루에 두 갑씩 담배를 피우곤 했다. 1999년 12월 31일 신문명정책연구원 송년회를 하면서 금연을 공언했다. 담배를 끊겠다고 생각한 것은 후배가 지나친 흡연은 정서불안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술은 좋아한다. 주량은 보통 소주 한 병이고 제대로 마실 때는 2병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