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2주기] 장기표 “‘지금 여기’가 화두요 열반이었던 스님”

스님들 앞에서 말씀 중인 조오현 스님
“스님은 위로는 국가 지도자로부터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는 좌우에 걸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웠으며 시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하여 현대 한국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9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을 엮은 김병무·홍사성의 말입니다. 2018년 입적하신(음력 4월12일) 조오현 스님 2주기(6월 3일 신흥사에서 다례재)가 돌아옵니다. <아시아엔>은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에 실린 조오현 스님을 回憶하는 글들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스님께서 열반하시기 꼭 엿새 전 아침 일찍 전화를 하셨다. 만해마을로 오라고 하시면서 차가 없으면 택시를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무문관 수행에 드신 후 오래 뵙지 못한 터라 반갑기는 했지만, 택시라도 타고 오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쩌렁쩌렁해서 스님 신변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착각이었다. 이날 오후 4시쯤 뵈었는데, 곡차를 드시고 있었다. 스님은 어떤 경우라도 정신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덜컥 겁이 났다. 저러다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어서. 내가 말씀드린다고 들을 분이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드렸다.

“스님, 건강을 챙기셔야지요. 곡차는 그만 드십시오.” 그랬더니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 건강해서 무엇 하나” 하셨다. 스님은 평소 자주 ‘죽을 때가 지났다’든가 ‘이제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했다. 그래서 보통은 건성으로 들어 넘겼는데 이날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열흘 넘게 곡차만 드신 데다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너무나 크게 해서 정말 무슨 결심을 하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렵다는 무문관 수행을 즐겁게 하는 터라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싶었다. 아무튼, 스님을 뵙고 돌아온 후 어쩐지 자꾸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날 담소 중에 남북관계 등 현재의 시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마침 정휴 스님이 쓴 <백담사 무문관 일기>를 읽은 것이 생각나 그 얘기를 화제로 꺼냈다. 거기에는 대선사들의 열반에 관한 일화들이 소개돼 있었다.

예컨대 죽을 때를 밝혀놓고는 그 시간이 되자 방에서 나와 하늘과 산천을 들러보고는 ‘나는 이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열반하신 경우, 또 점심 공양 잘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책하다가 선 채로 열반하신 보행 열반의 경우 등이었다.

나는 말끝에 생과 사를 자유롭게 넘나든 대선사들의 해탈에 경이로움과 부러움의 뜻을 내비쳤더니, 한편은 공감하시는 듯하면서도 “다 쓸데 없는 짓”이라고 일갈하셨다. 그런 것마저도 버려야 할 상(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평소 나는 스님께 나의 어설픈 생사관을 피력한 일이 더러 있다. “멋지게 죽고 싶어도 죽음은 삶의 총화라 멋지게 죽으려면 삶을 멋지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말이었다. 건방진 말이기는 하지만 나의 이런 말은 나의 바람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불교적 진리를 온전히 깨치신 것으로 보이는 스님이 도인답게 멋지게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나의 이런 어설픈 생사관에 스님은 그저 듣고만 있었지만, 사실은 내가 바라는 이상으로 생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정해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번에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도 그러하거니와 스님께서 쓰신 여러 시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열반 직전에 나를 불러서 죽음을 암시하신 것 등 여러 정황으로 보아 스님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를 정해놓고서 그 뜻대로 돌아가셨다. 이는 중국 선사들 못지않게 멋지게 돌아가신 것이고, 이처럼 생사를 초월해 멋지게 돌아가신 것은 멋지게 살아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보아온 대로다.

스님의 행장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선시조(禪時調)의 개척자이자 대가라는 점일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스님만큼 불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에 기초해 우주와 인생의 근본 이치를 밝힌 시조시인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스님이 불교적 진리를 온전히 터득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단 선시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스님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씀도 지나고 보면 불교적 진리를 온전히 설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물은 일이 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불교의 진리를 다 깨쳤습니까?”라고. 그때마다 스님은 “깨치기는 무엇을 깨쳐. 나는 깨친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언젠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스님은 “내가 예전에 소설 <싯다르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불교의 진리를 다 알았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좀 뜻밖이었다. 동양 사람도 아니고 서양 사람이 쓴 소설을 읽고서 불교를 다 알았다고 말씀하시니 말이다. 나도 오래전에 읽은 일이 있지만, 그저 꽤나 깊이가 있는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싯다르타

그런데 그날 스님의 말씀이 하도 단호해서 다시 읽어보았는데, 과연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만했다. 나의 얕은 불교 지식으로 보건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불교적 진리를 다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딱딱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을 통해서 말이다.

주인공 싯다르타는 온갖 세상사를 경험하면서 거기서 불교적 진리를 깨쳐 갔고, 특히 강가에서 자연현상을 보면서 불교적 진리를 깨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불교일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dharma)이 바로 이것일 터이니 말이다.

흔히 불교는 부처님이 해탈을 위한 위대한 가르침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불법을 발견한 것일 뿐 진리를 만든 사람은 아니다. 부처님이 설한 법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윤회 내지 생사고락에서 해탈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없던 진리를 창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진리를 찾아낸 것이겠기 때문이다.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문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이 세상 모든 것은 존엄한 존재로서 인연 따라 일어나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것임을 깨달아 이를 담담히 받아들임으로써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해탈의 법열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리라.

스님은 <싯다르타>를 통해 이것을 알아차렸고, 바로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 곧 불법임을 아셨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불교에서 법(法)으로 번역되는 범어의 다르마(dharma)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법도 말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법과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스님이 하루살이 떼나 아지랑이, 허수아비, 고목, 축음기 등을 보고서 우주와 인생의 근본 이치를 설파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 “산색은 그대로가 법신이며, 물소리는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구절이 있다. 스님의 시는 이런 경지를 현실의 세계에서 보여준다. 나아가 오히려 “무수한 중생들이 빠져 죽은 장경바다”라는 말로 진실을 보지 못하고 문자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꾸짖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각자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 경험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다.

아무튼 설악무산 스님은 불법의 이치를 크게 깨친 분이 틀림없다. 스님이 해설한 <벽암록>과 <무문관>의 ‘사족’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선문답을 일상사, 일상어로 오늘의 우리에게 꼭 맞도록 해설해 놓은 것을 보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결제법문이나 해제법문을 보아도 타성화된 중국 조사들의 어록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또한 스님의 불교 이해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말해준다. 스님의 열반 소식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고 또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은 분명하니, 이제 스님께서 남기신 시와 어록에서 스님의 설법을 들어야겠다.

필자 장기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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