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2주기] 황우석 “평생 처음이라며 받으신 ‘상임고문’ 명함”
“스님은 위로는 국가 지도자로부터 시골 촌부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는 좌우에 걸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교유했다. 때로는 가르치고 때로는 배웠으며 시대와 고락을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시인이기도 했던 스님은 한글 선시조를 개척하여 현대 한국문학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2019년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인북스)을 엮어 펴낸 김병무·홍사성의 말입니다. 2018년 입적하신(음력 4월12일) 조오현 스님 2주기(6월3일 신흥사에서 다례재)가 돌아옵니다. <아시아엔>은 <설악무산 그 흔적과 기억>에 실린 스님을 回憶하는 글들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편집자>
[아시아엔=황우석 수암생명공학연구원장] 어른스님의 고함 “야, 이놈아.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찾아올 거냐!” 어느 날 오후, 평소 먼저 전화를 주시는 법이 거의 없는 어른 스님께서 수화기 너머로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셨다.
‘보고 싶다는 뜻이구나’ 하고 속내를 짚은 나는 차를 몰아 만해마을로 갔다. 인제군수를 지낸 김 군수와 함께 계신 스님은 아침에 일어나면 깨질 듯한 두통과 구역질이 나서 김 군수의 안내로 인제의 병원에서 머리 부위를 촬영해봤더니 큰 병원으로 가기를 권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모 대학병원의 K 교수에게 전화로 진료를 예약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으로 모시고 가 MRI를 촬영했는데 스님의 뇌 조직상태는 20대 청년처럼 반흔조차 없이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 왈 “역시 큰스님의 남다르신 수행정진을 이 MRI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침의 두통은 스님께서 주무시면서 무호흡 상태가 반복되면서 뇌조직에 산소공급이 부족하여 일어나셨을 때 통증을 느끼시는 것같습니다”라고 했다.
스님은 평소 병원 진료를 극도로 싫어했다. 기왕 금식하고 오신 김에, 나와 우리 가족의 주치의인 L 교수께 부탁해 위내시경 검사를 한번 하자고 권했더니 뜻밖에도 ‘그러자’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3층 외래진료실로 가서 L 교수에게 위내시경 검사를 받으셨다.
위는 너무 깨끗했고 다만 역류성 식도염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어 조직검사용 생검을 하였다. 단순한 식도염으로 여기고 약을 처방받아 나온 며칠 후였다. L 교수가 만나자 하여 갔더니, 조직검사결과 식도암으로 판정되었다는 것이다.
관련 진료자료 복사본을 가지고 서울대 암병원장으로 있는 동서를 만나고, 가까운 지인이 총장과 병원장으로 있는 일본으로 가서 상의를 했다. 미국의 유명 대학병원에 제자가 교수로 있어 그곳에도 자료를 보내 의견을 구했다. 공통된 조언은 하루빨리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 의견들을 종합하여 스님을 찾아뵈었다. 이미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다.
스님은 나에게 대뜸 “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하러 왔지? 그래 얼마나 더 산다더냐?”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검사결과와 그간의 조언들을 말씀드렸다. 스님께서는 아주 차분하게 “내가 살 만큼 살았다. 여기서 더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중이 할 노릇이 아니다. 내 속가의 어른께서도 식도암으로 고생하다가 지독한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그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새벽 4시까지 스님을 설득했다. 내가 하도 간곡하게 말씀드리자 스님은 못 이기는 척 그러자고 했다. 나는 “아침 일찍 낙인이 형(서울대 성낙인 총장)을 오시라 할까요? 아무래도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아니, 자네 주치의가 L 교수라 하지 않았나? 그분이 인상도 좋고 꽉 차 있더라. 거기로 가겠다” 했다.
스님은 3일 뒤 L 교수에게 점막하 종양제거술을 받았다. 조직검사 결과 종양은 제거된 점막 부위에만 한정되어 있어 추가적인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는 필요 없었다. 스님은 약 10일간 미음과 연식으로 적응하시다 정상적으로 공양을 하시게 되었다.
암환자들의 철칙인 정기검진은 3개월 후에 한 번 더 했다. 수술 자국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스님은 2차 검진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표면적 이유는 무문관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열반할 때까지 추가검진은 끝내 거부하셨다.
나중에 성낙인 총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강권하다시피 서울대 병원으로 모셔서 검진하니 수술이 완벽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료진의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대선후보도 전직대통령도 스님 찾아
“아니, 대선이 며칠 남았다고 그 바쁜 문 후보께서 나를 만나러 오시겠다는 겁니까?” 옆에서 들으니 대선 수 주일 전 문재인 후보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날 오후 6시경 스님의 거소에 다녀간 것 같았다. 나에게 함께 있으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셔서 그런 자리는 두 분끼리만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며 빠져나왔다.
어느 날은 스님께서 코리아나호텔 중식당을 예약하라 했다. 8명의 오찬 예약이었다. 나에게 동행을 권하셔서 누구냐 여쭈니 전직 대통령이라 했다. 그쪽에서 나도 함께 참석해도 좋다는 전갈이 왔다고 굳이 함께 하자셨다. 그곳에는 안숙선 명창, 신달자 시인, 이근배 시인, 홍성란 교수 등이 함께했다. 오찬 장소에서는 이런저런 덕담이 오갔다. 전직 대통령을 대하는 스님의 모습에서 모든 사람을 감싸 안으려는 넉넉한 품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서울대 총장공관의 만찬 초대에 함께 가자 하셨다. “저는 대학에 있을 때 많이 가봤기 때문에 스님만 다녀오시지요.” “총장도 자네와 함께 오란다.” “쫓겨난 제가 참석할 자리는 아닙니다. 더구나 낙인이 형은 함께 부학장을 역임한 이래 저의 징계위원회 석상에서도 신중한 판단을 제기한 유일한 분이셨기에 제가 피해야 할 자리입니다.” 나는 끝내 그 자리를 피했다.
식도암 수술 후 스님은 수일간 입원해 계셨다. 병원에서는 회복을 위해 문병을 제한했음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분들이 찾아왔다. 각계각층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서 스님의 깊고도 넓은 인간관계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 된 후 처음 가져보는 명함이야”
줄기세포 사태 이후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을 설립하여 연구에 진력하던 우리 팀에게 스님은 매년 백담사와 봉정암 기도를 권하셨다. 스님께서 열반에 들기 전까지 9년 연속 모든 연구원이 봉정암에 올라가 1박을 하면서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곤 하였다. 그 감사함과 존경심을 담아 우리는 스님을 연구소로 모셔와 사용하실 방과 침실을 만들어드리고 언제든지 머무시면서 우리에게 지혜를 일러주도록 부탁드렸다.
내친김에 수암생명공학연구원 상임고문이라는 명예직을 맡아달라고 했다. 스님은 기꺼이 이를 수락해주셨다. 연구소에서 모든 실험실에 출입할 수 있는 카드키와 명함을 만들어 드렸더니 스님은 “내가 중이 된 이래 처음 가져보는 명함이구나!” 하고 파안대소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우리 연구원들도 백담사나 봉정암에 가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 가슴이 너무 아릴 것 같다. 스님과 함께 어느 날 충남 부여의 내 생가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스님은 집터를 둘러보며 말씀했다.
“자네가 나올 만한 터다. 하지만 시절과 나라의 인연이 대한민국에서는 비껴가는 것 같다. 일부에서는 자네를 평할 때, ‘소, 돼지의 ○○까기나 할 수의학과 교수가 생명과학 분야로 선을 넘으니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하더라. 그러니 네가 힘든 거다. 기회가 온다면 이 땅을 떠나라. 그리고 더운 사막의 나라로 가서 둥지를 틀어라.”
그 말씀대로 나는 중동의 어느 나라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스님에게 중동의 연구소를 한번 방문해달라고 했다. 상임고문 거처도 마련해놓겠다고 했다. 스님은 웃으면서 그러겠노라 하셨다. 그러나 스님은 끝내 중동의 우리 연구소에는 오지 못하고 떠나셨다.
아, 이제 나는 어려울 때마다 누구를 찾아뵙고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아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