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홍라희·이재용 만난 스님 보수·진보 넘어 ‘함께 손 잡고 오르다’
[아시아엔=조현 한겨레 종교담당 기자] 정념 스님이 서울 성북구 돈암2동 흥천사에 조실채를 멋지게 지었다. 오현 스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결국 스님은 살지 않고 토굴 같은 거처와 무문관을 오가다 입적했지만, 처음엔 서울의 사찰에서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데 기대감이 큰 듯했다. 스님은 조실채의 이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절에서 조실채는 염화실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절집 용어 외엔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1, 2주일을 나름대로 고민해봤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손잡고 오르는 집’.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격절탄상(擊節歎賞)이 터져나왔다. 그 이름만큼 불교의 이상, 그리고 그가 살아온 동체대비적 삶, 살고자 하는 삶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다. 오현 스님은 늘 손잡고 올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자들, 무시당하는 자들, 버려진 자들, 아픈 자들, 약한 자들과 함께.
스님은 2011년에는 반값등록금 촉구 집회에 나갔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약식기소된 대학생들이 1인당 15만~5백만 원씩의 벌금 고지서를 받고 힘들어한다는 <한겨레> 기사를 보고는 한겨레신문사에 벌금 총액인 1억3천만원을 기부해 벌금을 대납하게 했다. 이 사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해 당시 ‘한 스님의 기부’로만 알려졌다. 혹자는 스님이 가난한 문학인들과 예술인들과 약자들을 지원한 것을 두고 절집 돈으로 인심을 쓴 것 아니냐고 한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신흥사보다 절 수입이 몇 배나 되는 사찰들이 우리나라엔 있지만, 그 사찰의 실력자들이 이렇게 공적인 곳, 혹은 이름 없이 보살도를 행한 것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현 스님은 돈이 들어오는 대로 그 돈이 가장 요긴하게 쓰일 곳, 가장 필요로 한 곳, 가장 빈한한 곳, 가장 아픈 곳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다. 그래서 돈이 그에게서 머물러 있는 법이 없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게을러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벽암록>과 <무문관>을 써서 꼬리가 밟혔다. 스님은 자신을 한없이 비하했지만, 그 속에 든 천재성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가끔 우리끼리 나누는 대화 중에 그는 어려운 문자를 쓰는 걸 거의 피했지만, 그가 어지간한 불교의 한문 경전들을 꿰고 있을 만큼 천재적 암기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님은 말년에 1년 중 6개월을 감옥과 같은 무문관에 들어가면서도, 나와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또 다른 무문관이나 다름없는 거처에서 홀로 지냈다. 그것이 안타까워 “스님, 이제 연세도 있으니, 절에서 시봉을 받지, 왜 이렇게 지내시느냐?”고 물으면, 이랬다. “노인네라는 게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게 돼 있어.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 죽지도 않고 잔소리만 해대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잔소리꾼이 어른이라고 앉아 있으면 절에 손님이 와도 나만 찾아와. 주지한테는 들르지도 않으면 주지는 허수아비가 되는 거야. 그러니 나처럼 늙은 노인네는 절에서 피해 주는 게 돕는 거라.”
그러면서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다 귀찮아할 제자들을 생각해서 절을 나와 홀로 지내며, 막걸리로 허기나 채우며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매사 사리가 분명했고, 일신의 편리를 도모하기보다는 사리를 따랐다. 스님은 열반 몇 해 전에 서울 한남동의 삼성가 오너의 자택에 초청을 받아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을 만났다고 한다. 홍라희 여사는 불교와 원불교에서 널리 존경받는 분들을 자주 뵙고 있었다. 한결같이 계행이 청정한 이들인데 이날 결이 다른 오현 스님과 마주한 것이다.
소문을 들은 홍 여사는 스님에게 약주를 올리고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스님은 이날 이재용 부회장에게 “중국이나 후진국에서 버는 돈들을 가져올 생각을 말고 그곳에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야 그들이 삼성을 적대기업이 아니라 자기 나라를 위한 자기 나라의 기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또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라고 했다. 자신들이 존중받은만큼 충성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은 “스님께서 이 험한 세상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스님이 제정한 만해대상은 진보, 보수나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벽이 없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님은 신영복 교수에게 만해대상을 주기를 원했다. 이미 많은 진보적 인사들이 상을 받았지만, 시상을 주관하는 <조선일보>에서 ‘신영복만은 안 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다음 해 다시 상정해 기어이 뜻을 이루는 뚝심을 내보였다. 흥천사 조실채인 ‘손잡고 오르는 집’의 편액을 내가 신영복 선생에게 부탁해 받아준 인연도 있어서, 그때 심사위원단에게 보낼 추천서를 스님이 내게 써달라고 요청했는데, 신영복과 함께 또 하나의 추천사도 요청했다. 쌍용자동차 해고근로자 등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는 ‘손잡고’라는 단체였다. 그는 당시 쌍용차 해고근로자들의 자살이 이어지는 상황을 보며, 만해대상을 주어 상금 5천만원으로라도 간접 지원해주고 싶어 했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불교 승려들의 안일과 나태, 좁은 안목을 비판하면서 이웃종교의 예를 들어 안목을 트이게 했다. 그는 기독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청계천 피복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하다 분신한 전태일을 기리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아무도 몰래 매달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사실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늘 ‘조오현 스님을 뵙고 싶다’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스님이 2011년 이 여사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감으로써 유족들에 의해 밝혀졌다.
만해대상 수상자를 결정할 때도 승려나 불자 여부를 따지지 않았고, 만해마을에 유숙하는 문학인들과 그가 지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더욱 좋은 기독교인이 되도록 했고, 승려들에겐 좁은 안목을 격파해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오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