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주호영이가 기왕 시작한 거 국회의장은 한번 하고 마쳐야 할 텐데···”
[아시아엔=주호영 국회의원] 내가 경북 김천법원에 근무하던 1993년경 금오산 해운사에 계시던 정휴 스님을 몇 차례 찾아뵌 일이 있었다. 그해 연말 강화도 전등사에 갈 일이 있다고 말했더니 기왕 나선 김에 양양 낙산사에 계시는 오현 스님을 꼭 한번 찾아뵈라는 것이었다. 12월 30일을 전등사에서 묵은 다음 몇 시간을 달려서 섣달 그믐날인 31일 오후 서너 시경 낙산사에 도착했다. 종무소에 들러 스님을 찾아왔다고 하니 고향당(古香堂) 어두운 골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방안에 촛불만 켜놓고 앉아 계시던 스님은 물컵에 소주를 가득 부어 주면서 마시라고 했다. 초면에 사양하기도 어려워 빈속에 여러 잔을 마시고 물러났다.
그대로 잠이 들면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믐날 밤의 찬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밤새도록 낙산사 경내를 돌면서 술을 깬 다음 새벽예불을 했다. 다음날 다시 인사를 드렸더니 스님은 “안 그래도 되는데”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씀은 그날 내가 밤새도록 돌아다니면서 술을 깨고자 애쓴 일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님에게는 소주나 녹차가 그저 기호 음료에 다름 아닌 것 같았다.
1994년에는 법관 해외연수로 미국 대학에 가서 공부할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보는 나로서는 보이는 것마다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스님께 편지를 썼다. “불교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으로 받아들이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 여섯 가지 인식작용(六識)이 되어 번뇌를 일으키는 가상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보고 듣는 것마다 새롭고 신기하여 천지개벽을 보는 듯합니다.” 이 편지를 읽은 스님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웃으셨을까?
어느 해 낙산비치호텔에서 묵은 적이 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서 만경창파에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스님은 시에 관해 이런저런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당신이 쓴 몇 편의 시들을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 스님의 오도송으로 알려진 ‘파도’도 그때 들었던 것 같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여러 편의 시를 다 외울 수 있을까. 그래서 여쭤봤다. 스님의 대답은 이러했던 것 같다. “가슴으로 쓴 시는 절대 잊히지 않는 법이지요.” 십수 년 전 어느 잡지사에서 <한국의 명문장>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어낸 일이 있었다. 과연 당대의 명문장들이 많았다. 그 책을 본 이후로 나는 명문장이라고 생각되는 글들을 보면 모아두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아버지를 세 번 보았다’라는 글이나 ‘외국산 쌀 개방에 대한 찬성토론’ 등은 나 혼자 찾아낸 명문장이라 지금도 가끔 읽으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스님은 1997년에 종문제일서라는 <벽암록>을 역해한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책은 본문의 역해와 이를 풀이한 ‘사족’은 물론이지만 특히 서문에 해당하는 ‘사족에 대한 변명’은 정말 좋은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본시 천하 게으름뱅이였다. 예닐곱 살 때 서당에 보내졌으나 개울가에서 소금쟁이와 노느라고 하루해가 짧았고, 철이 조금 들어 절간의 소 머슴이 되었으나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 일년 농사를 다 망쳐놓건 말건 숲속의 너럭바위에 벌렁 누워 콧구멍이 느긋느긋하게 잠자는 것이 일이었다···”
어느 날 그 서문을 읽은 소회를 말했더니 스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일행들과 여러 차례 설악산을 오르내렸다. 수렴동 계곡에서 공룡능선을 거쳐 마등령, 비선대로, 백담계곡에서 용아장성을 타고 봉정암을 거쳐 천불동으로 걸었다. 산행하기 전에 백담사에 들렀더니 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이렇게 덕담을 해주었다. “설악산을 넘어 다닐 수 있는 여러분들을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건강이 있어야 하고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나는 그 이후로 산에 갈 때마다 산에 다닐 수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을 느낀다.
스님과 인연을 맺은 재속 제자가 여러 분 있는 것으로 안다. 한번은 재속 제자가 되기로 한 어떤 분이 스님에게 “스님, 주호영 의원은 뭐라고 당호를 지어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주호영이는 주인이 따로 있다”라고 말씀했다. 스님은 내가 오래전부터 직지사 녹원 스님을 모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님은 녹원 스님에 대한 예의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다.
몇 해 전 스님이 대구로 내려와서 권기호 시인, 이상규 교수, 이태수 시인과 점심을 함께한 적이 있다. 이태수 시인은 나의 지역구 안에 있는 범물성당의 총회장이고, 마침 그날 성당에 행사가 있어서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이 시인은 일어나면서 스님더러 괜찮으면 성당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스님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동행해서 성당 행사에 축하의 말씀을 하시고 신부님과 신도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어느 해부터인가 스님은 자주 “이제는 많이 살아서 지겹고 가야 할 날이 벌써 지났다”라고 말했다. 나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들었는데 아마 오래전부터 적멸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느낌은 받았다. 호상을 부탁했던 평생의 도반 정휴 스님으로부터 오현 스님의 근황과 생각을 가끔씩 들으면서 작별의 날이 머지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직지사 녹원 스님 영결식 때였다. 그때 스님은 무문관에 입관하고 있었는데 녹원 스님 원적 소식을 듣고는 몰래 나와서 3일 동안이나 빈소를 지켰다. 나도 그때 들러서 잠깐 뵙고 인사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폭삭 망한 정당’에서 몇 차례 의원을 하고 소임도 맡았던 까닭에 당이 이 지경이 된 데 나의 책임과 허물도 적지 않다. 어떻게 정치 인생을 잘 회향할까 고민 중인데 스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주호영이가 기왕 시작한 거 국회의장은 한번 하고 마쳐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로서는 황송하기도 하고 고민도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