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조오현] 큰스님께 조정민 목사 서명 담은 성경책 드리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브라질 출장 중이던 지난 4월 15일 저녁(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지붕과 벽 등이 화염에 휩싸이고 파리 시민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브라질 바헤이라스주를 이동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인터넷으로 화재 장면을 보고서 2005년 4월 초 양양 낙산사 화재가 떠올랐다. 한국기자협회 회장이던 필자는 화재 사나흘 뒤 중국 방문 중 조오현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큰스님, 중국에 와 있습니다. 낙산사 화재가 걱정돼 전화 올렸습니다.” 듣고 있던 스님께서 소리를 지르신다. “이상기 회장,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요? 사람들이 자기 가슴에 불타는 것은 못 보면서 절간 좀 탔다고 호들갑이에요.”
이후 남대문이 모두 불에 타는 등 크고 작은 화재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큰스님 말씀을 떠올렸다. 낙산사는 화재 4년 만에 이전 모습을 되찾았다. 큰스님의 예리한 육안과 부드러운 심안이 정념스님을 통해 부처님께 전달된 게 아닌가 싶다.
큰스님과 만해대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였다. 2004년 초 일이다. “만해대상 받을 사람 좀 추천해줘요. 꼭 부탁해요.” 나는 2002년 8월 처음 시상식에 참석했지만, 그때까지 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조선일보, 동국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상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며칠 뒤 남아공 만델라 전 대통령을 드리면 어떻겠냐고 여쭈었다. “자격도 충분하고 만해대상 취지에 딱 맞지만 가능하겠소?” “해보겠습니다. 그분이 수상하면 만해대상과 만해 선사의 정신이 보다 멀리 알려지면서 빛도 나고 가치도 높아질 겁니다.” 스님은 선뜻 “잘 될 거요. 한번 추진해봐요.” 하셨다. 처음엔 “전 세계에서 수도 없이 수상 제안을 해오는데 모두 거절한다”던 만델라재단은 당시 주한 남아공 대사 편에 만해대상과 만델라 대통령의 수상 이유를 전해 들은 후 수상을 수락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몇달 뒤인 8월 12일 주한 남아공 대사 부부를 보내 만해대상(평화부문)을 수상했다.
큰스님은 텔레비전과 신문 지상을 통해 ‘올해 만해대상은 어느 분이 받으면 좋을까’ 하고 늘 궁리하다,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이가 떠오르면 내게 전화를 걸어오곤 하셨다.
2012년 봄이었다. “이상기 회장(스님께선 당시까지도 나를 ‘이 회장’ 또는 ‘이상기 회장’으로 불러주셨다. 과분하기도 하고, 때론 거리를 두시는 게 아닌가 하여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관장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시상식에 꼭 참석토록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주저 없이 “해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미 3년 전인 2009년 시린 에바디 이란 변호사(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를 평화부문 수상자로 선정해 시상식에 모시기까지의 지난(至難)했던 과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스님께선 국내 수상자뿐 아니라 해외 수상자도 이처럼 직접 챙기곤 했다. 2012년 수상자인 아키 라 캄보디아 지뢰박물관장과 함께 2011년 아누라다 코이랄라 마이티네팔 이사장도 스님이 직접 찾아내 추천한 수상자로 기억한다.
2009년 시상식 때는 “이 회장 만해 선사가 정말 기뻐하실 것 같아요. 올해 선정이 무척 잘 됐어요. 애썼어요” 하고 말씀했다. 그해 수상자는 고(故)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앞서 언급한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이란의 시린 에바디 변호사였다.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 챙기는 데 스님은 누구보다 앞장섰다. 2014년 만해대상 특별상 수상자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손잡고’의 노란봉투 캠페인이 선정된 것은 순전히 큰스님의 아이디어와 의지로 이뤄진 것이다. 며칠 전부터 “꼭 관철되도록 해줘요” 하고 몇 번이나 전화를 주셨던 게 엊그제 일 같다. 2007년 네팔기자연맹, 2013년 엘 알람 모로코작가협회 회장, 2014년 아시라프 달리 이집트 기자와 모흐센 마흐말바프 이란 영화감독 등이 수상하며 만해대상은 아시아 여러 국가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2016년께부터 인제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리는 시상식 자리에 큰스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듬해부터는 아예 만해대상에서 손을 놓으셨다. “내가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지난 20년 동안 틀이 잡혔으니 이젠 알아서들 하라”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물론 이전에도 시상식 단상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행사장에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으시니 빈자리가 너무 커 보였다. 나만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만해대상 심사위원을 15년 이상 하면서 배운 게 참 많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소개하려 한다.
2010년 수상자 중 40대 안팎의 연소자(?)가 2명이나 됐다. 전무(全無)한 일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스님께 조그만 목소리로 여쭸다. “수상자 나이가 너무 어린 게 아닌가요?”
스님은 심사위원들이 다 들리게 소리 높여 답하셨다. “맞아요. 저 사람들 나이는 어리지만, 공적이 많아요. 그리고 저분들 지금 받으면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그리고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나처럼 나이 들면 욕된 일이 더 많아져요.” 하시는 거였다.
나는 스님이 일찍 열반에 드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지나고 보니 별세 80여일 전인 작년 3월 1일 동안거 해제 때 뵌 게 마지막이 된 셈이다. 필자는 작년 5월 초 존경하는 조정민 목사님께 성경책에 큰스님 성함을 적어 목사님 서명을 적어달라는, 쉽지 않은 부탁을 드렸다. 5월 8일 어버이날 오현 큰스님이 받으실 수 있도록 발송했다.
큰스님은 이미 성경책을 몇 차례 독(讀)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선물하고 싶었다. 스님에게 성경책 선물이라니. 아마도 이 글을 읽은 이들은 ‘뭐 저런 어처구니 없는···’ 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그런 파격(破格)을 일깨워주신 큰스님께 너무 많은 걸 배웠다. 성경책 선물을 받으신 열흘 남짓 뒤 큰스님은 눈을 감으셨다. 스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셨을까?
한국기자협회장 시절이던 2002년 7월 백담사에서 처음 뵌 오현 큰스님은 동행한 서울 소재 언론사 지회장 20여명에게 독한 위스키를 따라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기자님들이 쓰는 기사 한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압니까?” 스님과의 인연은 당시 육군 3군사령부, 해군 2함대, 공군 작전사령부 등 수도권 군부대 방문 계획이 직전 발생한 서해교전으로 무산되면서 맺어진 거였다. 이후 20년 가까운 세월, 스님은 한결같이 나를 이끌어주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흔적은 더 깊이 드리워질 것이다. 스님이 무척 그립다.